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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수직 그림에 사선 그려?…우리 갈라섭시다!" [화폭역정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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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 기자I 2026.11.06 07: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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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파랑·노랑 격자로 추상미술 문법 만든 '피터르 몬드리안'
20대부터 풍경 그리고 꽃그림으로 돈벌이
엇갈린 나무가지들이 만든 균형·질서 발견
검은 선 속 빨강·파랑·노랑, 격자추상으로
수직·수평, 우주의 질서 삼은 엄격한 원칙
사선 그린 신조형주의 동지와 결별케 해
나치 피해 68세에 망명한 미국 뉴욕에서
검은 선 원칙 깨고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말년에 품은 사선캔버스는 미완의 걸작돼

피터르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2~1943). 1940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몬드리안이 뉴욕시절에 남긴 대표작이다. 평생 구축해 온 신조형주의 화법을 스스로 뛰어넘는 작업으로 꼽힌다. 결정적인 변화는 빨강·노랑·파랑색의 면을 두르고 있던 검은 윤곽선이 사라진 것이다. 덕분에 멈춰 있던 선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율동감을 얻었다. 뉴욕에서 처음 접한 바둑판처럼 반듯한 도로망, 그 사이를 오가는 자동차와 사람, 밤거리를 비추는 화려한 불빛 등의 도시풍경에 당시 유행하던 재즈음악인 ‘부기우기’의 빠르고 통통 튀는 피아노리듬을 결합해 구성했다. 캔버스에 유채, 127×127㎝. 뉴욕 현대미술관(MoMA·미국 뉴욕) 소장.
피터르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2~1943). 1940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몬드리안이 뉴욕시절에 남긴 대표작이다. 평생 구축해 온 신조형주의 화법을 스스로 뛰어넘는 작업으로 꼽힌다. 결정적인 변화는 빨강·노랑·파랑색의 면을 두르고 있던 검은 윤곽선이 사라진 것이다. 덕분에 멈춰 있던 선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율동감을 얻었다. 뉴욕에서 처음 접한 바둑판처럼 반듯한 도로망, 그 사이를 오가는 자동차와 사람, 밤거리를 비추는 화려한 불빛 등의 도시풍경에 당시 유행하던 재즈음악인 ‘부기우기’의 빠르고 통통 튀는 피아노리듬을 결합해 구성했다. 캔버스에 유채, 127×127㎝. 뉴욕 현대미술관(MoMA·미국 뉴욕) 소장.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1965년 8월, 스물아홉 살의 이브 생로랑(1936∼2008)은 프랑스 파리 16구의 작은 쿠튀르하우스(맞춤의상실)에서 가을겨울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었다. 무릎길이의 단순한 원피스 위로 검은 선이 가로세로로 지나가고, 그 선이 나눈 칸마다 빨강·노랑·파랑, 또 흰색이 들어앉아 있었다. 컬렉션 전체에서 이런 옷은 여섯 벌에 지나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곧 이를 통째로 ‘몬드리안 컬렉션’이라 불렀다. 그해 9월 프랑스판 ‘보그’는 이 옷을 표지에 실었고 생로랑은 옷본을 패턴회사에 넘겨 누구나 집에서 재봉틀로 지어 입을 수 있게 했다. 값싼 모조품이 뒤를 이었다. 같은 해 겨울 미국 디트로이트 오토쇼에서는 새로 나온 자동차 곁에 선 판촉 모델들이 몬드리안 무늬의 원피스와 모자를 맞춰 입고 손님을 맞았다.

피터르 몬드리안(1872∼1944)이 세상을 떠난 지 21년 뒤의 일이다. 자신의 그림이 원피스가 되고 자동차 판촉 모델의 옷이 된 것을 봤다면 몬드리안은 질색했을지도 모른다. 몬드리안에게 검은 선과 원색의 칸은 결코 장식이 아니었다. 그는 선과 색으로 우주의 근본 질서를 그리려 했다. 그러니 그의 그림이 오늘날 널리 사랑받는 방식, 곧 산뜻하고 경쾌한 무늬로 소비되는 방식은 그의 의도와 정반대에 서 있다. 그런데 그 옷들이 놓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옷감 위에 박제된 검은 선은, 몬드리안이 생의 마지막에 스스로 허물어 버린 바로 그 격자였다.

생계 위해 꽃그림만 십수 년…기본기에서 출발한 추상

스무 살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몬드리안은 십수 년 동안 풍차와 강변과 농가를 그렸다. 초상을 주문받고, 꽃그림을 그리고, 세균학 교재에 들어갈 과학 삽화를 그려 생계를 이었다. 전환의 기미는 서른여섯 무렵에 나타난다. 나무 한 그루를 그려도 그는 점점 나무의 생김새보다 가지들이 엇갈리며 이루는 균형과 질서를 보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그가 신지학회에 정식으로 가입한 때와 겹친다.

신지학회는 1875년 미국 뉴욕에서 설립한 단체다. 세계 모든 종교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오랜 지혜가 있으며 우주와 인간은 물질에서 정신으로 진화해 간다고 가르쳤다. 경험과 관찰로는 닿을 수 없는 더 깊은 지식이 있다는 이 가르침은 세기말 유럽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사로잡았다.

스물일곱 살의 피터르 몬드리안. ‘검은 선과 빨강·파랑·노랑의 삼원색’이란 엄격한 추상화 이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풍경과 꽃 등 전통회화 수련에 매진하던 청년 시절이다. 1899년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진을 찍은 이는 알 수가 없다.
스물일곱 살의 피터르 몬드리안. ‘검은 선과 빨강·파랑·노랑의 삼원색’이란 엄격한 추상화 이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풍경과 꽃 등 전통회화 수련에 매진하던 청년 시절이다. 1899년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진을 찍은 이는 알 수가 없다.
서른아홉 살이 되던 해 몬드리안은 꿈을 품고 네덜란드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하지만 3년 뒤 병든 아버지를 보러 네덜란드에 들렀을 때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 5년 동안 발이 묶이고 만다. 불운이었으나 그 시간에 몬드리안은 예술여정을 함께할 사람을 만나게 된다. 테오 판 두스부르흐(1883∼1931)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경향을 ‘신조형주의’라 이름 지었고 잡지 ‘데 스틸’을 창간했다.

이 시기 몬드리안은 구상적 요소를 일체 배제하고 수직·수평선(검은색 격자)과 삼원색(빨강·노랑·파랑), 무채색(흰색·회색)만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이는 이후 1920∼1930년대에 걸쳐 비대칭이지만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격자 추상화로 이어졌다.

피터르 몬드리안의 ‘커다란 빨간색 평면에 노란색·검은색·회색·파란색이 어우러진 구성’(1921). 현대 추상미술의 발전을 이끈 가장 중요한 지점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몬드리안의 초기 격자 추상화다. 일체의 상상이나 구상을 빼고 엄격하게 들인 선·색·면의 구성 덕에 이후 ‘차가운 추상’으로도 불렸다. 검은 선에 둘러싸인 빨강·파랑·노랑 등 기본색만으로 분할한 면은 사후 20년이 지난 1960년대 중반부터 패션·건축 등의 분야에서 다양하게 복제·응용됐다. 캔버스에 유채, 59.5×59.5㎝. 헤이그미술관(네덜란드 헤이그) 소장.
피터르 몬드리안의 ‘커다란 빨간색 평면에 노란색·검은색·회색·파란색이 어우러진 구성’(1921). 현대 추상미술의 발전을 이끈 가장 중요한 지점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몬드리안의 초기 격자 추상화다. 일체의 상상이나 구상을 빼고 엄격하게 들인 선·색·면의 구성 덕에 이후 ‘차가운 추상’으로도 불렸다. 검은 선에 둘러싸인 빨강·파랑·노랑 등 기본색만으로 분할한 면은 사후 20년이 지난 1960년대 중반부터 패션·건축 등의 분야에서 다양하게 복제·응용됐다. 캔버스에 유채, 59.5×59.5㎝. 헤이그미술관(네덜란드 헤이그) 소장.
1919년 파리로 돌아온 몬드리안과 판 두스부르흐는 11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지가 됐지만 기질은 사뭇 달랐다. 몬드리안이 거리를 두고 예의를 중시했다면 판 두스부르흐는 열정적이고 요란했다. 가난을 버티는 방식도 달랐다. 몬드리안은 여전히 꽃그림으로 생계를 이었고, 판 두스부르흐는 인맥을 동원해 작품을 팔고 일을 벌였다. 처음에는 그저 성향이 달랐던 것으로 여겨졌으나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둘 사이에는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이 두 사람의 균열은 그림에 대한 시비로 가시화됐다. 판 두스부르흐가 자신의 화면에 ‘사선’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수평과 수직을 우주의 근본 쌍으로 믿었던 몬드리안에게 사선은 원리를 흐리고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몬드리안은 판 두스부르흐가 자신들의 신조형주의를 “자의적으로 수정했다”며 어떤 협업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데 스틸’을 떠나버렸다. 세상은 이 결별을 사선 하나를 둘러싼 다툼으로 기억한다. 사실 바깥에서 보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원칙을 중시한 몬드리안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듬해 겨울 몬드리안은 한 전시 개막식에서 마주친 판 두스부르흐를 모른 척 지나치고 만다.

테오 판 두스부르흐의 ‘반대 구성’(1924). 피터르 몬드리안과 결별하게 한 결정적인 작품이다. 수직·수평선만을 고수한 두 사람의 신조형주의 원칙에 판 두스부르흐가 ‘사선’을 들이면서 상황이 불거졌다. 판 두스부르흐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선의 유희를 넘어 엄격한 형식주의의 경계를 허물고 공간에 역동성과 확장성을 불어넣으려 했던 전위적인 시도였다. ‘반대 구성’이란 작품명 역시 기존 원칙에 정면으로 대치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 100×100㎝.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장.
테오 판 두스부르흐의 ‘반대 구성’(1924). 피터르 몬드리안과 결별하게 한 결정적인 작품이다. 수직·수평선만을 고수한 두 사람의 신조형주의 원칙에 판 두스부르흐가 ‘사선’을 들이면서 상황이 불거졌다. 판 두스부르흐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선의 유희를 넘어 엄격한 형식주의의 경계를 허물고 공간에 역동성과 확장성을 불어넣으려 했던 전위적인 시도였다. ‘반대 구성’이란 작품명 역시 기존 원칙에 정면으로 대치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 100×100㎝.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장.
나치의 그림자가 짙어지자 몬드리안은 20여 년을 산 파리를 떠나 1938년 영국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이내 런던에도 폭격이 시작되자 다시 대서양을 건너야만 했다. 잠시 피해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미국으로 망명을 해버린 것이다. 1940년 뉴욕 땅을 처음 밟았을 때 그는 예순여덟 살이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노인이 됐고 영어는 서툴렀으며 가진 것이라곤 유럽에서 그리다 만 캔버스화 몇 점이 전부였다. 기대도 희망도 안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몬드리안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

평생 일군 성과 ‘의심’…서명 마친 완성작 뜯어고쳐

뉴욕에서 첫날밤, 몇 해 전 파리로 그를 찾아왔던 젊은 미국인 화가 해리 홀츠먼(1912∼1987)이 그를 맞았다. 홀츠먼은 블루스 스타일인 부기우기 음반을 틀어줬는데 바로 그때였다. 그 음악을 배경으로 몬드리안의 눈에 맨해튼이 들어온 것이다.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나뉜 거리, 그 위로 치솟은 마천루, 밤이면 일제히 밝혀지는 불빛, 쉼 없이 오가는 사람과 차. 지난 30년 동안 캔버스에서 추구해 온 수평과 수직의 세계가 현실의 도시로 서 있었다. 격자 위로 불빛이 깜박이고 사람과 차가 흘렀다. 그의 그림이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숨 쉬는 박동이었다.

몬드리안이 뉴욕에서 처음 한 일은 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옛 그림을 다시 여는 것이었다. 뉴욕 첫 개인전을 준비하며 그는 예전 그 그림들에 다시 붓을 댔다. 이미 서명을 마친 그림 위 검은 선을 지우고, 선과 선 사이에 작은 색면을 끼워 넣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화가가 스스로 끝냈다고 서명한 그림을 다시 뜯어고친다는 것은 자신이 이룬 것을 ‘의심’할 엄청난 용기였다.

그 끝에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2∼1943)가 태어났다. 이 그림에서 사라진 것은 ‘검은 선’이다. 20년 넘게 몬드리안의 화면을 떠받쳐 온 뼈대, 한눈에 몬드리안을 알아보게 한 표시, 생로랑의 원피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그 검은 선이 이 그림에는 없다. 몬드리안이 평생 지켜 온 질서의 상징이 그 ‘검은 선’이었다. 그런데 일흔의 몬드리안은 낯선 도시에 처음 듣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완성작을 뜯어고치고, 마침내 그 표시까지 지웠다.

더 특별한 점은 그토록 원칙을 중시했던 몬드리안이 이런 변화를 원칙의 포기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전 그림에서 다들 높이 산 고요함은 사실 자신이 원하던 것, 곧 균형 속 역동적 운동을 표현할 능력이 모자라서 생긴 결과라고까지 하면서 말이다. 모두가 ‘변화’라고 생각했던 것을 몬드리안은 ‘미완’이라고 여겼고 이 새로운 화면을 더 밀고 나갈 작정이었다.

피에트 몬드리안의 ‘빅토리 부기우기’(1944). 몬드리안이 세상을 떠난 이후 작업실에 남아 있던 생애 마지막 미완성 유작이다. 오래전 ‘사선’ 문제로 테오 판 두스부르흐와 갈라섰던 몬드리안이, 삶의 마지막 순간 캔버스 자체를 사선으로 기울이고 수직·수평선을 그려 넣은 사실이 알려지며 더욱 극적인 작품이 됐다. 색 구상을 위해 이리저리 옮겨 붙였던 종이 테이프가 그대로 붙어 있는 상태로 보존돼 있다. 작품명 ‘빅토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연합군 승리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다. 캔버스에 유채, 127.5×127.5㎝. 헤이그미술관(네덜란드 헤이그) 소장.
피에트 몬드리안의 ‘빅토리 부기우기’(1944). 몬드리안이 세상을 떠난 이후 작업실에 남아 있던 생애 마지막 미완성 유작이다. 오래전 ‘사선’ 문제로 테오 판 두스부르흐와 갈라섰던 몬드리안이, 삶의 마지막 순간 캔버스 자체를 사선으로 기울이고 수직·수평선을 그려 넣은 사실이 알려지며 더욱 극적인 작품이 됐다. 색 구상을 위해 이리저리 옮겨 붙였던 종이 테이프가 그대로 붙어 있는 상태로 보존돼 있다. 작품명 ‘빅토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연합군 승리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다. 캔버스에 유채, 127.5×127.5㎝. 헤이그미술관(네덜란드 헤이그) 소장.
그러나 더 나아갈 수 없었다. 1년여가 지났을 무렵 폐렴으로 몸져누운 몬드리안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흔두 살이었다. 작업실에는 마름모꼴 캔버스 하나가 남아 있었다. ‘빅토리 부기우기’(1942∼1944)다. 사선 때문에 동지와 갈라섰던 몬드리안이 마지막에 붙들고 있던 것이 사선의 캔버스에 그린 수직·수평선이었던 것이다. 화면에는 물감과 함께 색 테이프 조각들이 붙어 있었다. 뉴욕에서 그는 색을 칠하기 전 색 테이프를 붙였다 떼었다 하며 구성을 이리저리 옮겨 보곤 했다. 미완의 그 그림은 지금도 테이프가 붙은 채로 보존돼 있다.

엄격함은 수정됐다. 사선 하나를 용납하지 않던 몬드리안, 서명한 그림을 다시 뜯어고치던 몬드리안은 같은 사람이다. 자기 원칙을 지키기 위해 벗과 갈라섰고, 자기 원칙을 더 밀고 나아가기 위해 자신과도 갈라섰다. 진정한 엄격함이란 하나의 형식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 아니라 그 형식이 진리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스스로 허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검은 선과 세 원색의 문법을 세운 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도 몬드리안의 격자는 원피스·포스터·머그잔 위에서 끝없이 복제되고 있다. 그의 이름이 지금껏 살아 있는 까닭은 복제된 격자에 있지 않다. 테이프가 붙은 채 끝나지 않은 마지막 화면에 있다.

이브 생로랑의 ‘몬드리안 드레스’(1966). 검은 선과 빨강·파랑·노랑의 삼원색이 바탕인 피터르 몬드리안의 격자 추상화를 복제한 원피스를 입은 모델들이 벽에 걸린 몬드리안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브 생로랑의 ‘몬드리안 드레스’(1966). 검은 선과 빨강·파랑·노랑의 삼원색이 바탕인 피터르 몬드리안의 격자 추상화를 복제한 원피스를 입은 모델들이 벽에 걸린 몬드리안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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