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불 나자 70대 암 환자부터 구한 소방관[매일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사람들]⑪

이연호 기자I 2024.01.18 16:06:20

울산남울주소방서 최규찬 소방관, 2020년 33층 주상복합 ''삼환아르누보 화재'' 현장 투입
28층 테라스서 구조 대상자 발견 후 70대 암환자부터 신속히 건물 밖 이송
"생에 대한 강한 의지 느껴"...구조 후 고층 화재 진압 난관 부딪혀
28층까지 로프 이용해 소방호스 연결 후 ...

[편집자주] ‘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First In, Last Out·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늦게 나온다)’ 소방관이라면 누구나 마음속 깊이 새기는 신조 같은 문구다. 불이 났을 때 목조 건물 기준 내부 기온은 1300℃를 훌쩍 넘는다. 그 시뻘건 불구덩이 속으로 45분가량 숨 쉴 수 있는 20kg 산소통을 멘 채 서슴없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소방관이다. 사람은 누구나 위험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위험에 기꺼이 가장 먼저 뛰어드는 사람들이 바로 소방관인 것이다. 투철한 책임감과 사명감 그리고 희생정신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단련된 마음과 몸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다. 지난해 10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소방청에서 제출 받은 ‘소방공무원 건강 진단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소방공무원 정기 검진 실시자 6만2453명 중 4만5453명(72.7%)이 건강 이상으로 관찰이 필요하거나 질병 소견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 이상자 중 6242명(13.7%)은 직업병으로 인한 건강 이상으로 확인됐다.

이상 동기 범죄 빈발,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해 점차 복잡해지고 대형화되는 복합 재난 등 갈수록 흉흉하고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매일 희망을 찾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농연(濃煙) 속으로 주저 없이 들어가는 일선 소방관들. 평범하지만 위대한 그들의 일상적인 감동 스토리를 널리 알려 독자들의 소방 업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소방관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고취하고자 기획 시리즈 ‘매일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지난해 11월 9일 ‘소방의 날’을 시작으로 매주 한 편씩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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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찬 소방관(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 소방 대원들이 지난 2013년 3월 9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서 발생한 산불을 밤샘 작업 끝에 완전 진화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최규찬 소방관 제공.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 2020년 10월 8일 늦은 밤이었다. 울산시 남구에 있는 고층 주상복합 삼환아르누보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최초 화재 신고가 접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방본부 차원의 출동 명령인 화재대응 2단계 비상소집 발령이 내려졌을 정도로 화재가 삽시간에 번졌다.

거센 강풍을 타고 불은 33층 규모 건물 전체에 옮겨붙었다. 울산남울주소방서(당시 울산남부소방서 소속) 최규찬(52) 소방관은 9일 오전 0시 40분께 현장에 투입됐다.

최 소방관에게 맡겨진 첫 번째 임무는 인명 검색이었다. 2인 1조로 건물 내부로 진입해 28층까지 피난계단을 통해 빠르게 이동했다. 당시 삼환아르누보는 그 큰 규모와 강풍으로 건물 내부 다수 지점의 화재와 이에 따른 연기로 거주자는 물론 작전에 투입된 화재 진압 대원들마저도 위험성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 소방관은 제복을 입은 이상 위험을 회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곧바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20kg 산소통을 멘 채 힘겹게 28층에 도착하자 다행히 십수 명의 사람들이 옥외 테라스에 모여 있었다.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이었다. 총 18명이었다. 먼저 최 소방관은 “이제 저희가 왔으니 괜찮습니다”며 구조 대상자들을 안심시켰다. 이어 구조 우선순위를 정했다. 모두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 암환자 1명, 임신부 1명, 어린이 3명과 그 보호자 1명 총 6명을 우선 구조 대상으로 선별했다.

최 소방관은 그중에서도 70대 여성 암환자 A씨를 가장 먼저 건물 밖으로 이송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A씨에게 보조 마스크를 씌운 뒤 계단을 서둘러 내려가려고 하니 등뒤에서 보호자가 “소방관님”이라며 불렀다. 곧 이어 “저희 어머니를 좀 업고 갈 수 없으십니까”라고 부탁했다.

최 소방관은 조심스럽게 “지금 계단에 장애물들이 많아 자칫 넘어지가라도 하면 더 위험해 질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보호자도 순순히 동의했다. 그럼에도 최 소방관은 부축하고 내려가다 정 힘들어 하면 그땐 업겠노라 약속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지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최규찬 소방관(사진 오른쪽에서 네 번째)이 지난 2018년 7월 25일 국민·공무원 제안 공모에서 ‘소방호스 수나사 보호 커플링’의 아이디어를 제안해 동상을 수상하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최규찬 소방관.
하지만 28층에서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가기란 건강한 70대라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게다가 건물은 안팎으로 맹렬히 타고 있었고 계단은 소방 호스 및 각종 가정용 가구 및 집기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최 소방관은 A씨의 공포심을 덜어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어머니. 제 팔만 꼭 잡으세요. 제가 살려드리겠습니다”고 했다. A씨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반쯤 내려왔을까. A씨는 최 소방관의 팔을 유독 세게 힘을 줘서 잡으며 “계속 내려갈 수 있습니다”고 했다. 최 소방관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그때 A씨의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느꼈습니다.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라고. 결국 최 소방관의 든든한 조력 아래 A씨는 무사히 걸어서 건물 밖으로 탈출했다. 최 소방관이 A씨를 죽음의 장소에서 삶의 공간으로 인도하고 있을 그 무렵 불은 강풍을 타고 28층 외벽 위로 사납게 솟구쳤다.

A씨와 그 보호자를 환자 분류소에 무사히 인계한 최 소방관의 다음 미션은 28층 위로 치솟은 화재 진압이었다. 그간 수많은 출동을 나가 본 베테랑 최 소방관도 28층 높이까지 옥외로 소방호스를 전개해 본 적은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지상에서 벌어진 즉석 작전 회의 중 최 소방관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3층 테라스에 대원 2명을 미리 배치한 뒤 28층으로 다시 오른 최 소방관은 길고 튼튼한 로프를 아래로 내려보냈다. 3층에 대기하고 있던 연계 대원이 로프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로프 끝에 작은 휴대용 랜턴을 묶었다. 이를 통해 쉽게 지상까지 내려간 로프에 지상에서 대기 중이던 대원들은 소방호스를 묶었다.

최 소방관은 로프를 있는 힘껏 잡아 당겨 소방호스를 28층까지 끌어올렸다. 이윽고 호스가 손에 들어오자 로프로 호스를 테라스에 지지했다. 지상의 펌프차와 원활한 무선 교신이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 유량 조절을 위해 호스 끝에 개폐 밸브까지 설치했다. 힘든 고비를 넘기자 진화는 완벽할 만치 순조로웠다. 더이상의 재발화는 없었다.

울산 소방본부는 화재 발생 이후 약 15시간 40여 분 만인 9일 오후 2시50분께 불을 완전히 껐다고 발표했다. 늦은 밤 시간대 대형 주상복합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고 강풍까지 불었으나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최 소방관은 당시 상황에 대해 “모두의 염원이 결국 기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때 화재로 표준운영절차(SOP) 및 각종 구조 전술을 숙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새겼다”며 “일분일초가 중요한 화재 현장에서 침착하게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심신 단련에 더욱 노력하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최규찬 소방관. 사진=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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