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에서 군사 개입을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를 정치적 대화의 장(場)으로 끌어내기 위한 서방사회 압박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다만 이에 부담을 느낀 듯 러시아는 전격적으로 독일이 제안한 중재기구 구성을 수락했고 우크라이나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옮겨가고 있다.
◇ 미국이 이끄는 서방사회, 러시아 압박수위 강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캐나다, 이탈리아 등 주요 7개국(G7) 정상들은 지난 2일(현지시간) 공동 성명서를 내고 “우크라이나 주권과 영토적 통일성을 분명하게 침해한 러시아의 군사 개입을 규탄한다”며 러시아 제재에 대한 국제사회 공조가 강화될 것으로 기대했다. 또 오는 6월 러시아 소치에서 개최 예정인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에 모두 보이콧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 위협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자 미국은 경고 수위를 높이고 있다. 실제 미국 정부는 이번주로 예정됐던 양자간 투자협정 협상과 에너지 문제 고위급 회담 등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미국 정부 관료는 “러시아는 현재 상황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며 “러시아 경제나 은행권은 국제사회 제재에 아주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 정부는 이미 러시아 기업들과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경제와 금융 제재를 채택하기 위해 의회와 협의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서방국가들이 합심해 제재에 나서면 러시아는 고립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논의하기 위해 오는 4일 키예프를 방문하는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러시아 기업들 자산이 동결되고 미국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자본을 빼내갈 수 있다”고 경고하며 결국 러시아가 G8 그룹에서 배제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나 문제는 러시아를 제외한 G7 내에서도 각론에서 의견차를 보이고 있어 미국 경고가 현실화될 지는 미지수다.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은 이날 공영 ARD방송에 출연, G8에서 러시아를 제외하는 방안에 대해 “서방국가들이 러시아와 직접 대화할 유일한 회의체인데 이것을 희생할 필요가 있느냐”며 반대했다.
이에 따라 G7 정상들의 성명서도 말미에 “우크라이나에 국제 중재단을 파견하는 결정을 지지하며 대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며 정치적·평화적 해결에 무게를 실을 수 밖에 없었다.
◇ 러시아, 중재기구 구성에 합의..국면전환 기대
일단 기대를 모으는 대목은 지난 2일밤 늦게 전화통화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회담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사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중재기구 구성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대립에서 대화로 국면이 전환될 전망이다.
이같은 러시아의 입장 변화는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됐다. 러시아의 군사 개입 자체가 실제 전쟁을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이권 장악을 노린 행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야코벤코 런던 주재 러시아 대사도 “의회가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에서 군사력 사용을 승인했지만 당장 군사력을 사용한다는 뜻은 아니다”며 “러시아는 정치적 해결을 위해 이해 당사국들과 공조할 것”이라고 점쳤다.
더구나 군사 개입 이후 자국 통화인 루블화 가치가 사상 최저까지 폭락하고 증시는 추락하자 러시아도 다급해졌다. 급기야 해외자본 이탈을 우려한 러시아 중앙은행은 단숨에 기준금리를 1.5%포인트(150bp)나 인상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서방국가들 역시 러시아 고립을 경고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지난 1일 우크라이나 동부 최대 도시인 카르키프에서는 수 천명의 친러시아 시위대가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시위를 벌였고 다음날인 2일에는 키예프에서 수 만명 시민들이 러시아의 군사 개입을 비난하며 크림 자치공화국 분리 독립을 반대하는 시위를 해 민심도 엇갈리고 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체 천연가스 수입량의 절반 이상을 대주고 있는 러시아 국영 가스업체 가즈프롬이 우크라이나의 숨통을 죄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세르게이 쿠르니야노프 가즈프롬 대변인은 “현재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갚아야 할 가스 대금 체납액이 15억5000만달러(약 1조6550억원)가 넘는다”며 “이를 신속하게 갚지 않으면 할인된 가격에 가스를 공급하기로 한 지난해 합의를 끝낼 수도 있다”고 밝혔다.
당장 재정지출을 유지하기에도 버거운 우크라이나는 정국 안정을 전제로 국제통화기금(IMF)과 150억달러 구제금융 지원 여부를 논의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