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의 눈]월가에 들어선 두려움 없는 소녀像

안승찬 기자I 2017.03.14 12:19:00

황소상 당당히 바라보는 월스트리트 소녀상
이사회에 여성 많은 기업에 투자하는 펀드도 출시
기업 이사회에 여성 비중 작은 현실 지적
한국은 여성 임원 비중 OECD 최하위..변화 필요

미국 뉴욕 맨해튼의 뉴욕증권거래소(NYSE) 앞에 세워진 소녀상.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황소상를 당당하게 쳐다보고 있다.(사진=SSGA)


[뉴욕=이데일리 안승찬 특파원] 기자의 쌍둥이 딸들이 좋아하는 만화책 ‘안녕 자두야’를 보고 놀랐다. 등장인물 소개에 자두의 엄마는 ‘자두네 가족의 절대 권력자!’로 소개돼 있다. 그럼 아빠는? ‘다정다감한 로멘티스트. 하지만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철부지’. 아이들은 꼭 이런 것만 본다. 왠지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 집의 권력은 이미 엄마로 넘어갔다. 아이들은 맨날 엄마만 찾는다. 아빠의 역할은 짐꾼이나 운전수인건가, 가끔 스스로에게 되묻곤 한다.

그런데 바깥세상은 딴판이다. 여성이 발붙일 곳이 많지 않다. 기업이 특히 그렇다. 얼마 전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에 소녀상이 생겼다.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세워진 동상이다. 소녀상의 모습이 아주 도발적이다. 원래 월스트리트의 명물은 황소상이다. 30년 전 블랙먼데이라는 주식시장 폭락을 경험한 이후 황소상이 세워졌다. 소녀상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이 황소상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어깨도 쫙 펴고 아주 당당하다. ‘두려움 없는 소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소녀상이 다른 곳도 아닌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스트리트에 굳이 자리를 잡은 데에 이유가 있다. 소녀상을 후원한 곳은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SSGA)이라는 자산운용사다.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다. SSGA는 최근 성별 다양성 상장지수펀드(ETF)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뉴욕증시에 상장돼 있는 기업 중에서 이사회에 여성이 얼마나 되느냐를 기준으로 투자하는 펀드다. 아무리 성장성이 좋아도 이사회가 순 남자들로만 구성돼 있으면 투자를 안 한다. 이사회의 여성 비중이 30%가 넘고 여성의 목소리가 기업 운영에 잘 반영되고 있는 회사만 골라서 투자한다. SSGA는 성별 다양성 상장지수펀드를 내놓은 기념으로 월스트리트 한복판에 소녀상을 세웠다.

이 펀드는 여성이 많은 회사가 돈도 잘 번다고 믿는다. 뒷받침하는 연구도 실제로 많다. 미국의 비영리 연구소인 패터슨 인스티튜드 포 인터내셔널 이코노믹스(PIIE)는 이사회의 여성 비중이 30% 이상인 회사가 비슷한 조건의 남자만 있는 회사보다 15%가량 이익을 더 낸다는 조사를 내놓기도 했다. 여성은 포용력이 좋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다. 이런 여성이 많으면 기업의 의사결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런데 이 펀드도 투자할 회사를 고르는 데 애를 먹는다. 미국 대기업은 여성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지만 중소기업은 여전히 모자란다. 중소형 회사로 구성된 러셀 300지수에 포함된 300개 업체 중에서 4분의 1은 이사회에 여성이 한 명도 없다. 미국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소녀상을 세운 SSGA는 “기업의 이사회의 남녀의 불평등이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동상의 모습이 성인 여성이 아닌 소녀의 모습을 띄고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명함도 못 꺼낼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심각하다. 우리나라 전체 여성 직장인 중에서 여성 임원의 비중은 0.4% 정도다. 여성 직장인 100명 중에서 1명도 임원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임원 되는 게 하늘의 별따기라지만, 그래도 남성들은 100명 중에 2~3명은 임원이 된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임원이 못된다. 국내 대기업쪽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500대 대기업 임원 중에서 여성의 비중은 고작 2.3%다. 30%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우리는 소녀상이 아니라 갓난아이상(像)을 세워야 할 판이다.

노르웨이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의무 할당제를 도입했다.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회사는 무조건 이사회의 여성 비중을 40% 이상으로 맞추도록 강제했다. 이후 여성들의 이사회 참여가 급증했다고 한다. 우리도 고민해볼 때가 됐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