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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데일리 안승찬 특파원] 기자의 쌍둥이 딸들이 좋아하는 만화책 ‘안녕 자두야’를 보고 놀랐다. 등장인물 소개에 자두의 엄마는 ‘자두네 가족의 절대 권력자!’로 소개돼 있다. 그럼 아빠는? ‘다정다감한 로멘티스트. 하지만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철부지’. 아이들은 꼭 이런 것만 본다. 왠지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 집의 권력은 이미 엄마로 넘어갔다. 아이들은 맨날 엄마만 찾는다. 아빠의 역할은 짐꾼이나 운전수인건가, 가끔 스스로에게 되묻곤 한다.
그런데 바깥세상은 딴판이다. 여성이 발붙일 곳이 많지 않다. 기업이 특히 그렇다. 얼마 전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에 소녀상이 생겼다.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세워진 동상이다. 소녀상의 모습이 아주 도발적이다. 원래 월스트리트의 명물은 황소상이다. 30년 전 블랙먼데이라는 주식시장 폭락을 경험한 이후 황소상이 세워졌다. 소녀상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이 황소상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어깨도 쫙 펴고 아주 당당하다. ‘두려움 없는 소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소녀상이 다른 곳도 아닌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스트리트에 굳이 자리를 잡은 데에 이유가 있다. 소녀상을 후원한 곳은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SSGA)이라는 자산운용사다.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다. SSGA는 최근 성별 다양성 상장지수펀드(ETF)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뉴욕증시에 상장돼 있는 기업 중에서 이사회에 여성이 얼마나 되느냐를 기준으로 투자하는 펀드다. 아무리 성장성이 좋아도 이사회가 순 남자들로만 구성돼 있으면 투자를 안 한다. 이사회의 여성 비중이 30%가 넘고 여성의 목소리가 기업 운영에 잘 반영되고 있는 회사만 골라서 투자한다. SSGA는 성별 다양성 상장지수펀드를 내놓은 기념으로 월스트리트 한복판에 소녀상을 세웠다.
이 펀드는 여성이 많은 회사가 돈도 잘 번다고 믿는다. 뒷받침하는 연구도 실제로 많다. 미국의 비영리 연구소인 패터슨 인스티튜드 포 인터내셔널 이코노믹스(PIIE)는 이사회의 여성 비중이 30% 이상인 회사가 비슷한 조건의 남자만 있는 회사보다 15%가량 이익을 더 낸다는 조사를 내놓기도 했다. 여성은 포용력이 좋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다. 이런 여성이 많으면 기업의 의사결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런데 이 펀드도 투자할 회사를 고르는 데 애를 먹는다. 미국 대기업은 여성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지만 중소기업은 여전히 모자란다. 중소형 회사로 구성된 러셀 300지수에 포함된 300개 업체 중에서 4분의 1은 이사회에 여성이 한 명도 없다. 미국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소녀상을 세운 SSGA는 “기업의 이사회의 남녀의 불평등이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동상의 모습이 성인 여성이 아닌 소녀의 모습을 띄고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명함도 못 꺼낼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심각하다. 우리나라 전체 여성 직장인 중에서 여성 임원의 비중은 0.4% 정도다. 여성 직장인 100명 중에서 1명도 임원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임원 되는 게 하늘의 별따기라지만, 그래도 남성들은 100명 중에 2~3명은 임원이 된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임원이 못된다. 국내 대기업쪽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500대 대기업 임원 중에서 여성의 비중은 고작 2.3%다. 30%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우리는 소녀상이 아니라 갓난아이상(像)을 세워야 할 판이다.
노르웨이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의무 할당제를 도입했다.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회사는 무조건 이사회의 여성 비중을 40% 이상으로 맞추도록 강제했다. 이후 여성들의 이사회 참여가 급증했다고 한다. 우리도 고민해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