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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로 갈 것인가, 일본으로 갈 것인가. 대구에서 오랜 세월을 무명작가로 지낸 그이는 그 갈림길에서 잠시 망설였다. 2000년대 초반, 드라마 ‘가을동화’ ‘겨울연가’가 연달아 한반도는 물론 바다 건너 일본열도까지 뒤흔들고 있을 때였다. 두 드라마에서 톡톡히 조연을 담당한 ‘그림’과 ‘글씨’는 물론, ‘원작가가 누구냐’는 관심이 들끓었더랬다.
하지만 서울이든 일본이든 어차피 그이에게는 ‘먼 산’이었다. 꽃길을 찾는 여정이 아니라 살기 위해 나서야 하는 길이었으니까. 비로소 세상이 그이의 붓을 알아봤다지만 생활고를 해결하는 데는 어림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그저 딱 한 번, 이제껏 쥐어본 적도 없는 그 작은 행운에 못 이기는 척 기대면서 말이다. 뭐가 됐든 수를 내야 했던 거다.
지난한 고민 끝에 그이가 향한 곳은 서울이다. 아니다. 일산쯤에서 멈췄다. “18평짜리 오피스텔을 마련하고 죽기살기로 그림만 그리기” 시작했다. 2004년 일이다.
작가 이수동(64). 화랑이든 아트페어든 내다 거는 족족 그림이 팔려나가 아예 ‘완판작가’란 별칭이 자동으로 붙는 작가. 그이가 참으로 암울했던 20년 전, 이미 아득한 옛일이 돼버린 그 시절을 새삼 다시 들추는 데는 이유가 있다.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쯤이던, 그래서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기만 했다던” 다른 한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바로 일본 미술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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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부터 “때를 기다려온” 숙원 이뤄
일본 오사카 사사키갤러리는 지난해 가을 일찌감치 ‘이수동 전’을 예고했다. 23일부터 28일까지 닷새간 열리게 될 이 작가의 개인전에 달린 부제는 ‘일상에서 행복의 조각을 찾는다’. 100호 규모의 대작을 앞세워 신작 45점으로 전시장을 채운다.
무엇보다 이 작가 개인으로는 일본 미술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첫 개인전이라는 데 의의가 크다. “결정 직후, 20년 전 때를 기다린다는 마음으로 일본이 아닌 서울로 향했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작가는 “그만큼 일본전시는 계속 꿈꿔왔던 숙원을 이룬 일이기도 하다”고 소회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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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숙원’이란 게 그렇듯 그리 평탄한 과정은 아니었나 보다. “이번 전시는 일본 여행·외식업체 스기타그룹의 아티스트 후원으로 이뤄졌다. 한국의 이담문화예술재단이 힘을 보태고. 여기에 뮤지컬 ‘태양의 서커스’의 물류를 담당해온 유티엘엔터로지스가 전시 진행을 맡았다.”
덤덤하게 말했지만 이 작가의 이번 일본 개인전은 국내 조력자를 끼우지 않고 가히 글로벌한 ‘외인부대’로 꾸려낸 ‘드문 성과’다. 바꿔 말하면 작가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확보해야 할 만큼 그 통로가 대단히 좁고 척박했다는 뜻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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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본 미술시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국내에 전무하다. 게다가 국내 작가의 활약 소식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중견부터 차세대까지 일본 작가들이 국내 미술시장을 휩쓸고 있는 경우와는 아주 대조적인 형국인 거다. ‘호박’이든 ‘무한그물망’이든 작품으로 컬렉터를 몰고 다니는 쿠사마 야요이(94)를 선두로, 최근 부산에서 14만명을 훌쩍 넘긴 관람객들을 동원한 무라카미 다카시(61), 젊은 세대에게 아이돌 스타 대접을 받으며 작품가를 올리고 있는 록카쿠 아야코(41)조차 일부일 뿐이니까.
이 작가의 일본 미술시장으로의 진출은 덕분에 ‘딴마음’도 들게 한다. 작가 이수동을 위시로 국내 작가가, 그간 제대로 성적을 낸 적 없는 새로운 해외시장에 먹힐지를 가늠하는 분수령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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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작가 활약 없어…日서 통할지 가늠할 분수령
그간 이 작가는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시적인 서정성을 무장한 ‘감성그림’을 그려왔다. 탄탄한 바탕에 문학적 상상력, 회화적 기교를 단순한 선과 선명한 색채로 융합한 작품들. 이번 일본 개인전 전시작도 다르지 않다. ‘한 쌍의 연인’ 연작을 비롯해 꽃·달·계절·구름·차·음악 등을 소재로 사랑·꿈·위로를 전하는 테마작을 두루 내놓는다. “일본 컬렉터가 좋아할 만한 색과 형체가 도드라진 작품을 따로 골라봤다”고도 했다.
이 작가 작업·작품의 강점이라면 ‘무장해제’라 할 거다. 으레 미술작품 앞이라면 따라붙기 마련인 긴장감·부담감을 훌훌 털어버리게 하는 일 말이다. 과연 일본인의 감성을 뒤흔들고 지갑까지 열게 해 ‘완판신화’를 이어갈 건가. 작가는 “첫술에 욕심은 부리지 않겠다”며 웃는다. 그저 “시장을 개척하는 입장”으로 겸손하게 다가서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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