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양미영 기자]최근 남미 기업들은 싼 값에 유럽 자산을 낚아채는 데 열중하고 있다. 2000년 초반 14건에 불과했던 남미 기업들의 유럽 자산 인수 건은 올해 35건을 넘어섰다. 1990년대 말 스페인 기업들이 남미 진출을 확대하면서 주요 자산들을 인수한 것과 정반대다. 남미 기업들로서도 그동안 아시아 주도의 천연자원 수요에 중점을 두면서 유럽 지역을 간과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우호적인 여건에 더해 확신이 설 때 유럽에 투자하자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남미, 유럽기업 사냥으로 옛 식민지 설움 한풀이(?)
브라질 기업 시너지아에로스페이스는 포르투갈 정부와 국영 항공사 탑포르투갈항공 인수를 위해 협상 중이다. 시너지는 이미 남미 최대 항공사 아비앙카타카의 주요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자금이 풍부한 남미 기업들은 유럽 자산 가격이 빠진 데다 우호적인 경제여건을 활용해 자금을 차입하기도 쉬워져 더없이 좋은 기업 인수합병(M&A) 기회를 맞고 있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유럽으로 쏠리고 있다.
남미 기업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점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 지역으로 사업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호세 에프로모비치 시너지 이사회 임원은 탑포르투갈항공 인수에 대해 “유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주개발은행은 중소형 남미 기업들에게 해외 확장을 돕기 위해 4억2000만달러(약4533억원) 의 신용을 제공했으며 150대 남미 대형기업 가운데 절반은 아직 유럽에 거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남미 의존도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 두 나라는 유럽에서 제대로 된 수익이 나지 않자 남미 지역에서 사업을 확장하면서 옛 식민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최대 은행 방코 산탄데르는 지난해 이익의 절반이 남미에서 나왔고 스페인 2위 은행 BBVA도 멕시코 매출이 스페인보다 많다. 포르투갈텔레콤도 고객의 3분의 2가 브라질에서 형성됐다. 유럽최대 통신업체 스페인의 텔레포니카는 시장 사정이 좋은 남미 사업부문의 기업공개(IPO)를 통해 자금을 조달해 부채를 감축하는 것을 모색하고 있다. 이미 텔레포니카는 남미 사업 본사를 스페인에서 브라질로 옮기겠다고 밝힌 상태다. 산탄데르도 지난 10월 멕시코 계열사 상장을 통해 40억달러를 조달했다.
남미 경제, 르네상스 시대 꽃 폈다
금융위기 이후 유럽과 남미의 경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최근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경제는 재정위기 타격으로 경기후퇴(recession)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내년까지 경기후퇴가 지속될 전망이다. 이들 국가는 실업률이 각각 25%와 16%로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다.
반면 남미 경제는 글로벌 경제 둔화 속에서도 경제성장 가도를 달렸다. 혹자는 남미가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남미 경제는 올해 3.2%, 내년 3.9%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칠레의 3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년대비 5.7% 증가했고 지난 9개월간 GDP 성장률이 5.6%에 달했다. 페루도 6.5%의 증가율을 기록했으며 올 한 해 4.75~5.25%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브라질은 올해 4% 성장이 예상된다. 모두 든든한 내수와 적극적인 투자유치, 친(親)시장 정책과 견고한 재정의 결과다. 브라질과 콜롬비아와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도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절반 수준에도 못미친다.
옛 식민지로 기우는 힘의 균형
이 같은 대조적인 경제현실은 지난달 열린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에서도 두드러졌다.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은 스페인·포르투갈과 양국 식민지였던 중남미 19개국의 연례 정상회담으로 1991년 발족됐고 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미 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 2007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제 17차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 폐회식 중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그 입 좀 닥치라!“ 라 말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당시 차베스가 스페인 전 총리에게 ‘파시스트’라는 등 독설을 퍼부은 것이 발단이 됐지만 남미에 대한 스페인의 거만함이 그대로 반영됐다는 평가도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 상황은 달라졌다. 포루투갈과 스페인은 남미 지원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구애를 펼쳤고 남미 수장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한 과도한 긴축에 대해 일침을 가하며 훈수를 두기도 했다. 스페인 언론들은 스페인이 남미로부터 ‘구명조끼’를 찾았다고 비꼬았다.
실제로 최근 유럽의 긴축행보에 대한 찬반이 분분한 가운데 과거 여러 차례 금융위기를 겪은 남미가 유럽에 일부 교훈을 제공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칠레 정부 출신의 헤랄도 무노즈 유엔개발계획(UNDP) 중남미담당 국장은 ”라틴아메리가의 경험이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유럽의 처방책이 허리띠를 졸라메는 식의 단순한 방법이 되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스페인 싱크탱크 연구소인 레알 인스티투토 엘카노의 카를로스 마라무드 전문가는 스페인 기업들의 남미 의존을 언급하며 ”유럽 위기가 스페인과 남미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를 바꾸기 시작했다“며 ”스페인이 과거에 누렸던 리더십을 단순하게 유지할 수는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