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윤희 미술평론가] “이제야 뭔가 좀 알겠군.”
아네모네가 가득 꽂힌 꽃병을 그리다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이렇게 말했다. 아네모네를 따 꽃병에 담아왔던 하녀는 르누아르 생의 마지막 날, 캔버스 앞에서 “오늘 뭔가 배웠어”라고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몇 시간 동안 정물을 그리던 르누아르는 그날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그 순간을 상상해 본다. 마지막 30여 년은 손가락이 뒤틀리고, 눈이 흐려지고, 휠체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보낸 세월이었다. 그 끝에서 그가 남긴 말은 절망의 탄식도, 신에 대한 원망도 아닌 “오늘 뭔가 배웠어”였다.
삶이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대개 고통은 질긴 현실이고, 행복은 짧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누아르의 그림 속 인물들은 늘 현재의 즐거움을 보여준다. 비록 손이 비틀려 굽고 한쪽 눈마저도 제대로 제어할 수 없는 신체적 고통 속에서도 르누아르는 인간과 자연의 ‘생기’를 화면에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13세에 도자기공장 견습…컵에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 그려
르누아르가 처음부터 순풍에 돛 단 듯 자연스럽게 화가가 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중서부 리모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네 살 때 가족과 파리로 이주한 그는 열세 살에 파리의 한 도자기공장 견습생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접시와 컵에 꽃과 덩굴을 그려 넣는 일을 했는데, 손이 빠르고 정확했던 소년 르누아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을 컵에 그리는 일을 맡게 됐다. 빠르고 정확하게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작은 도자기에 그려내는 그를 두고 동료들은 ‘무슈 루벤스’라고 불렀다. 하지만 손재주가 탁월한 소년은 기계식 인쇄 공정인 ‘전사’가 도입되며 설 자리를 잃었고 스무 살이 되면서는 일자리를 잃었다.
도자기공장을 떠난 르누아르가 향한 곳은 화가 샤를 글레르(1806∼1874)의 아틀리에였다. 글레르는 수업료를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 때문에 가난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곳에서 르누아르는 클로드 모네(1840∼1926), 알프레드 시슬레(1839∼1899), 프레데릭 바지유(1841∼1870)를 만났다. 훗날 인상파의 중심이 될 이름들이었으나 그때는 아직 무명의 청년들이었다. 다만 글레르의 가르침이 엄격한 아카데미 전통에 기반한 것이어서 르누아르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과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때로 배움은 스승에게서가 아니라 동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법. 파리 근교 샤투의 강변에서 모네와 나란히 이젤을 세우고 풍경을 그리면서 르누아르는 빛이 수면에서 부서지는 방식을 달리 보게 됐다.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생기기 전의 일이었다.
르누아르는 풍경도 그렸지만 풍요롭게 여가를 즐기는 파리 사람들의 모습에 매혹됐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에는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빛이 사람들의 어깨와 모자 위에 얼룩처럼 내려앉고 웃음소리가 들릴 듯한 공기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르누아르는 그림 속에 ‘현재’를 잡아뒀다. 지금 이 순간의 기쁨, 지금 이 순간의 빛을 화면에 가득 담아낸 것이다. 이 작품으로 르누아르는 인상파의 중심으로 올라섰고 비로소 그의 이름이 미술계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10여 년은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주문이 밀려들었고 파리 부르주아 집안의 초상화와 온갖 꽃을 담은 정물, 강변의 여인들을 쉬지 않고 그렸다.
|
1907년 예순여섯의 르누아르는 결국 사랑하던 파리를 떠났다. 관절 경직에는 따뜻하고 건조한 기후가 낫다는 말에 프랑스 남부 카뉴쉬르메르의 언덕 위 농가에서 계속 작업할 생각이었다. ‘레 콜레트’란 애칭으로 불린 그 집 주변에는 올리브나무가 빽빽했고, 그 나무들도 언젠가 그림이 될 것이었다. 레 콜레트에서의 일상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그림을 그리는 나날이었다. 숟가락도 잡기 어려운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팔꿈치와 어깨의 힘으로 그림을 그렸다.
1912년에는 빈에서 온 전문의가 르누아르가 다시 걸을 수 있도록 여러 시도를 했고 그는 착실히 의사의 말을 따랐다. 한 달여의 재활 끝에 르누아르는 딱 한 번 일어나 이젤 주변을 몇 걸음 걸었지만 바로 단념하고 말았다. 그러곤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포기하겠습니다. 걷는 데 의지력을 다 써버리면 그림에 쓸 게 남지 않아요. 걷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그림을 택하겠습니다.”
|
생애 마지막 대작 ‘목욕하는 사람들’(1918∼1919)을 그릴 때 르누아르의 전신 관절은 다 굳어 있었다. 화면에는 두 그룹의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앞쪽에 두 명이, 뒤쪽 배경에 세 명이 보인다. 레 콜레트의 올리브나무 정원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은 규모가 상당하다(110×160㎝). 그렇다면 르누아르는 이 대작을 어떻게 그렸을까. 휠체어에 앉은 채로는 화면 전체를 한눈에 볼 수도, 상단에 붓을 댈 수도 없었다. 그는 이 문제를 특수한 방식으로 해결했다. 캔버스를 이젤에 고정하지 않고 수직 롤러를 이용해 화면을 위아래로 이동시키며 단계별로 그려간 것이다. 어깨와 손가락을 움직이기 힘들어질수록 르누아르는 여러 방법을 강구하고 조정해 나갔다.
이 그림을 그리던 중에 앙리 마티스(1869∼1954)가 레 콜레트에 방문했다. 뒤틀린 손으로 붓을 움직이는 르누아르를 보며 마티스는 물었다.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계속 그림을 그리는 겁니까?” 르누아르는 잠시 붓을 멈추고 대답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으니까요.” 훗날 마티스는 그 말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터치가 거칠고 선이 뭉개지고 비례가 어색한 여체로 마감한 이 작품은 전성기에 선명하게 빛나던 여인들을 그린 작품과 비교되면서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마티스는 그러한 견해에 맞서며 이 작품이야말로 르누아르의 걸작이자 “지금껏 그려진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르누아르와 마티스의 짧은 대화를 오래 생각하게 된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말이다. 아름다움도 모르겠고 삶도 모르겠다. 하지만 르누아르의 삶은 적어도 이 하나를 보여주는 것 같다. 끝까지 간 것이라고, 도착지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길을 죽을 때까지 걸어갔다고.
|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가정집서 나온 백골 시신...'엽기 부부' 손에 죽은 20대였다 [그해 오늘]](https://image.edaily.co.kr/images/vision/files/NP/S/2026/03/PS26031300001t.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