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이데일리가 만난 수도권의 한 국립대 배터리 연구실 소속 대학원생 최모(28)씨는 반팔에 맨발이 훤히 드러나는 슬리퍼 차림으로 실험 중이었다. 최씨가 제조하던 물질은 전기차 배터리 제조 공정에 꼭 필요하지만 발암물질의 일종인 다이메틸포름아미드(DMF). 이처럼 유해약품이나 고온에 노출되기 쉬운 실험실에서는 치마나 반바지 등 맨살이 노출되는 복장을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씨는 이날 실험복이나 보안경을 착용하지 않은 채 DMF를 제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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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지적 한번에 80건”…온라인 안전교육은 ‘노룩패싱’
이데일리가 만난 주요 배터리 연구실 소속 대학원생들은 하나같이 실험실 안전 관리가 형편없다고 지적했다. 현행법(연구실 안전환경 조성에 관한 법률)상 대학은 지도교수를 ‘연구실 안전관리책임자’로,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연구실 안전관리담당자’로 지정한다. 사실상 연구실 소속 인원이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폐쇄적인 실험실 환경에서 안전 규정을 어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실제 이날 최씨의 실험실에는 후드가 닫힌 채 보관돼야 할 시약품 보관함의 후드(뚜껑)가 버젓이 열려 있었다. 최씨는 이를 ‘평소 모습’이라 설명하며 안전 점검 때마다 수두룩하게 지적받고 있다고 밝혔다. 최씨는 “두세 달에 한 번 교내 안전팀에서 점검하러 오는데 적게는 20~30건에서 많게는 80건까지 지적받는다”며 “안전점검 할 때만 잠깐 후드를 내리고 복장을 갖춰 입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위험 물질을 다루는 대학원생은 분기마다 온라인으로 연구실 안전 교육을 수료해야 하지만 제대로 이수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서울 소재의 한 사립대학교 배터리 연구실 소속 대학원생 서모(27)씨는 “연구실 사람들끼리 연구실 안전교육 홈페이지 소스 코드를 수정해 스킵(자동 넘겨 보기)하는 방법을 공유한다”며 “이 탓에 한 후배는 유해가스가 누출됐을 때 어떻게 환기하는지조차 모르더라”고 실상을 전했다.
실험실 안전불감증 최종 책임자인 지도교수도 마찬가지다. 울산의 한 대학교에서 최근까지 배터리를 연구했다는 박모(28)씨는 “지도교수가 소형 배터리 폭파 실험을 지시해 KF마스크만 쓴 채 실험할 수밖에 없었다”며 “교내에는 배터리 폭파 실험이 가능한 안전실이 없어 불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했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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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2023 연구실 안전관리 실태조사’에 따르면 대학 내 실험실 사고는 2021년 137건에서 2022년 174건, 2023년 196건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실제 지난 5일에는 고려대학교 실험실에서 아르곤 가스가 누출돼 120명이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고려대의 경우 지난 6월에도 실험실에서 증기가 발생해 70여 명이 대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학원생들은 노후화된 시설에도 학교가 안전 관련 투자에는 소극적이라 사고가 반복된다고 호소했다. 고려대학교 공과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윤모(28)씨는 “교내 실험 장비 중 노후화된 시설이 많지만 학교에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며 “지난해 R&D 예산 삭감 이후 연구비가 부족해 연구실에서 연구 과제로 확보한 사비로 비상전력 장비를 구매한 적도 있다”고 밝혔다.
조사에 따르면 2023년 12월 기준 ‘안전 관련 전담 조직’을 갖춘 대학은 전체 334곳 중 86곳(25.7%)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안전 투자에 소극적인 현실부터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채진 목원대 소방안전학부 교수는 “지도교수한테만 책임을 떠넘기고 학교 자체에서 안전 투자를 안 하다 보니까 사고가 느는 것”이라며 “안전관리처 같은 조직을 학교에 마련해 일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 명예교수는 “배터리는 한번 터지면 실험실은 물론 건물 자체가 소실될 정도로 위험한 물질”이라며 “안전 투자가 낭비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아리셀 참사 같은 대형 사고가 실험실에서도 반복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