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 급진좌파 성향의 시리자 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리스와 러시아가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스와 러시아는 유로존 국가들이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문제아라는 공통점이 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 대항해 서로를 보호해주며 밀월 관계가 짙어지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유로존의 시선은 곱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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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시리자 정권은 유럽중앙은행(ECB),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 등 트로이카 채권단에 부채 탕감, 긴축정책 완화 등 구제금융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재협상 시한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달 28일까지 재협상하지 못하면 구제금융이 끊기게 된다. 더구나 재협상 기간 동안엔 구제금융을 받지 못한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신임 총리는 28일(현지시간) 연립정부 내각 첫 회의에서 “경제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엄청난 부채를 탕감하고 공정하고 가시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채권단과 협상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이런 시리자 정권의 요구에 유로존 주요 국가들은 단호하다. 지그마르 가브리엘 독일 경제에너지 장관 겸 부총리는 이날 즉각 기자회견을 갖고 “그리스 부채에 대해 손실 탕감을 해주는 일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다른 유로존 국가들의 국민들도 채권단이 그리스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기존대로 유지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도 지원 사격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경제산업부 장관은 “그리스는 국제 채권단과의 합의사항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며 “그리스 정치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어떤 양보를 해준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시리자의 얘기를 들어준 곳은 국제유가와 루블화의 폭락,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인한 서방 국가의 제재로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빠진 러시아다.
러시아 안톤 실루아노프 재무장관은 이날 미국 경제매체 CNBC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그리스가 지원을 요청하면 도움을 주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니콜라이 피오도로프 러시아 농업장관 역시 지난 16일 “그리스가 유로존을 떠나게 되면 러시아가 그리스의 식품 수출 금지 해제를 돕겠다”고 말했다. 서방국가의 수출 금지는 러시아가 서방 국가의 제재에 대한 보복조치 중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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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15년만에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을 정도로 누구를 도와줄 처지가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를 위해 나선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유럽연합(EU)이 지난 주말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친러 성향의 분리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과 관련 러시아를 추가 제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리스는 이를 거부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 모인 28개 유럽연합(EU) 회원국 외무장관들은 러시아에 대한 추가적인 경제적 제재에 합의하지 못했다. 그리스는 러시아를 제재하자고 모인 자리에서 EU와 러시아간 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시리자 정권이 들어선 후 임명된 니코스 코치아스 외무장관은 “그리스는 EU와 러시아간 불화를 방지하기 위해 작업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스와 러시아간 밀월 관계는 점점 짙어지고 있다. 치프라스 총리가 정식 임명된 후 첫 번째로 만난 외국 외교관도 안드레이 모슬로 러시아 대사였다. 치프라스 총리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진 않지만, 시리자 정권이 냉전시대 러시아에 공감하는 좌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도 그리스와 러시아간 관계를 방증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고 있다.
그리스와 러시아를 바라보는 유로존은 경계감이 가득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 달 러시아가 일부 발칸반도 국가에 대한 정치적 및 경제적 의존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