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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벌었는데 실패?”…퇴직연금 수익률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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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기자I 2026.10.06 0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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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의 퇴직연금개혁 시나리오]21
美, 펀드 공시 표준 GIPS 도입해 운용사 체리피킹 막아
비교대상 불분명하면 제대로 된 연금 성과 평가 어려워
한국형 기금제도 성공하려면 성과평가 시스템 잘 만들어야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같은 숫자를 두고 정반대의 평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은행 금리가 2%인 시대에 수익률 10%는 분명 박수받을 성과입니다. 하지만 그해 주식 시장 전체가 30% 올랐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남들 다 30% 벌 때 혼자 10% 벌었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심각한 ‘실패’입니다. 반대로 시장이 20% 폭락했는데 손실을 5%로 막았다면, 손실이 났음에도 탁월한 방어로 칭송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숫자는 맥락 없이 존재할 때 가장 교묘한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연금 선진국들이 ‘얼마나 벌었나’라는 절대수익률만 보지 않고, 어떤 위험을 감수했고, 어떤 벤치마크와 비교해야 하며, 비용을 뺀 뒤 실제로 얼마를 남겼는지를 따지게 된 배경에는 투자 성적표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1990년대 월가, ‘체리 피킹’의 유혹

1990년대, 미국 자산운용 시장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였습니다. 수천 개의 운용사가 난립하며 저마다 “우리가 세계 최고”라고 광고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팸플릿을 보면 모든 운용사의 수익률이 시장 평균을 넘었습니다. 모두가 1등이라니,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밀은 ‘체리 피킹(Cherry Picking)’에 있었습니다. 맛있는 체리만 쏙쏙 골라내듯, 운용사들이 자신이 굴리는 수백 개의 계좌 중 수익률이 잘 나온 계좌만 골라서 보여주고, 망한 계좌는 슬그머니 통계에서 뺐던 것입니다. 심지어 “과거 5년 수익률”을 보여줄 때, 성과가 좋았던 특정 5년 구간만 잘라내어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투자자들은 이 화려한 숫자에 속아 돈을 맡겼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1999년, ‘정직한 성적표’의 탄생 — GIPS

이 혼탁한 시장을 정리하기 위해 전 세계 투자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미국투자관리연구협회(AIMR, 현 CFA Institute) 주도로 수년간의 논쟁 끝에 1999년, 기념비적인 국제 표준이 탄생합니다. 바로 GIPS(Global Investment Performance Standards, 국제투자성과기준, 펀드 운용사가 임의로 잘 나온 성과만 골라 보여주지 못하도록 전 세계가 약속한 통합 성과 공시 표준)입니다. GIPS의 철학은 단호했습니다. “공정하게 표시하고, 충분히 공개하라.”

1. 컴포지트 — 잘한 계좌만 뽑지 말고, 같은 전략으로 운용된 계좌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구성하라.

2. 일관된 기간 — 유리한 기간만 자르지 말고, 정해진 기간의 성과를 일관되게 제시하라.

3. 공개와 비교 — 비용, 계산 방식, 적절한 벤치마크를 함께 보여주어 숫자의 맥락을 드러내라.

이 기준이 도입되자 운용사들의 거품이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실력과 포장된 운을 구분할 언어가 생겼습니다. 연금 가입자와 기금의 의사결정자들은 비로소 운용역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설명을 요구하고, 필요하면 교체할 수 있는 잣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원칙의 이론적 뿌리는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52년 해리 마코위츠가 정립한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은 상관관계가 낮은 자산을 조합하면 같은 기대수익에서도 위험을 낮출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86년 브린슨 등의 연구는 연기금 성과를 이해하려면 종목 선택이나 시장 타이밍만 볼 것이 아니라, 장기 자산배분 정책을 먼저 봐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흔히 이 연구가 “성과의 90% 이상은 자산배분이 결정한다”는 문장으로 요약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장기 수익률의 변동과 설명에서 자산배분 정책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이 결론은 Part 1 제2장에서 짚은 ‘선택의 제한’을 다른 언어로 설명합니다. 모든 가입자가 종목을 직접 고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누가 자산배분을 설계하고, 그 설계가 벤치마크와 위험 수준에 비추어 제대로 작동했는지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과평가는 그래서 기금형만을 위한 기술이 아닙니다. 계약형이든 기금형이든, 누군가 가입자 대신 돈을 굴린다면 반드시 필요한 책임의 언어입니다.

한국의 현실 — 기준 없는 성적표

그렇다면 한국의 퇴직연금 시장은 어떨까요? 우리는 수익률을 공시하고 있지만, 그 숫자가 가입자의 실제 경험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어떤 위험과 비용을 거친 결과인지, 무엇과 비교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원리금보장 상품과 실적배당 상품을 뭉뚱그려 전체 수익률을 발표하면, 예금 비중이 높은 사업자는 운용 실력이 없어도 안정적으로 보이고, 적극적으로 투자한 사업자는 시장 상황에 따라 과도하게 나빠 보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벤치마크’ 개념이 약합니다. “올해 코스피가 5% 올랐는데, 당신네 주식형 상품은 왜 3%밖에 못 벌었나”라고 따져 묻는 문화가 충분히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비교 대상이 흐리면 평가도 흐리고, 평가가 흐리면 개선도 어렵습니다.

이런 왜곡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습니다. 한 제도의 도입 1년 성적표가 단순평균 수익률로는 높게 보였지만, 실제 가입자 자금 규모를 반영한 가중평균 수익률은 훨씬 낮게 나타났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소수의 자금이 들어간 고위험 상품이 크게 오르면 단순평균은 화려해집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돈이 낮은 수익률의 안전자산에 머물러 있다면, 가입자가 실제로 경험한 성과는 그보다 훨씬 낮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계산 방식 하나만 바뀌어도 성적표가 달라진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왜 GIPS 같은 엄격한 표준이 필요한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투명한 평가가 ‘신뢰’를 만든다

퇴직연금 선진화의 핵심은 ‘신뢰’이고, 그 신뢰는 검증된 성적표에서 나옵니다. 한국형 기금 제도가 성공하려면, 그리고 계약형 제도가 지금보다 나아지려면, 단순히 돈을 잘 굴리는 것을 넘어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시하고 제3자에게 검증받는 성과평가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합니다.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의 말은 퇴직연금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투명한 평가야말로 주인이 청지기를 통제하고, 시장의 질을 높이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돈을 모으고, 불리고, 비용을 아끼고, 검증하는 법까지 연금 운용의 기술적 토대를 모두 다졌습니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입니다 — 이렇게 정성껏 키운 돈을, 은퇴한 뒤에는 어떻게 나눠 써야 할까요? 다음 장부터는 한 사람의 마지막 관문, ‘인출’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집은 있지만 쓸 돈이 없는 역설적인 노후를 가장 먼저 겪은 호주의 경고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0% 벌었는데 실패?”…퇴직연금 수익률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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