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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세상에서 가장 흔해 빠진 말 ‘사랑’. 노래의 절반이 사랑을 부르고, 시의 절반이 사랑을 앓는 그 사랑의 의미는 실체를 붙들기 어렵다. 인간 삶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긴 쉽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서로를 갉아먹는 집착과 광기를 오가다가 마침내 바닥을 내보인다. 상대에 대한 사랑 혹은 병리적 집착에서 헤매다가 바닥을 치고, 그 바닥을 디디고 일어선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는 미술사에 남을 몇 점의 그림을 탄생시켰다. 집착의 상대는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부인 알마 말러(1879∼1964)였고 말러 사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코코슈카는 1886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나고 자란 화가였다. 세기말 빈은 화려함과 병약함이 깃든 도시였다. 클림트의 황금빛 관능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말러의 교향곡과 쇤베르크의 불협화음이 같은 공기를 호흡하던 그 도시에서 젊은 코코슈카는 국비 장학금을 받고 빈 공예학교에 들어갔다. 처음 그가 손댄 것은 엽서나 부채 그림 같은 장식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애초 그의 기질과는 어울리지 않았고, 스물두 살에 발표한 전시 작품들이 논란과 혹평을 불러 결국 공예학교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런데 그 무렵 코코슈카의 가능성을 알아본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화가 클림트, 다른 한 사람은 건축가 아돌프 로스였다. 특히 로스는 이후 오랫동안 코코슈카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돼 장식의 세계를 떠나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초상화에 전념하라고 권했다. 이렇게 새로운 커리어를 쌓아가던 청년 코코슈카 앞에 우연한 사고처럼 말러의 부인 알마가 나타난 것이다.
알마는 젊은 시절 작곡을 배운 재능 있는 음악가였다. 그러나 말러와 결혼을 앞두고 음악에 대한 꿈을 접으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 요구는 받아들였으나 알마는 결혼 생활 내내 포기한 작곡을 끄적였고 훗날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코코슈카를 비롯한 여러 예술계 남성들과의 연애에 인생을 걸었다.
“나의 알마, 당신은 잔인하고 거룩한 신 같습니다”
그렇게 1912년 스물여섯의 코코슈카가 서른셋의 알마를 만났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만 젊은 코코슈카는 알마를 숭배했고, 숭배는 곧 소유의 열망으로, 소유의 열망은 곧 질투로 번져 나갔다. 코코슈카가 알마에게 보낸 어느 고백은 이 상태를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요약한다. “나의 알마, 당신은 나를 살게도 하고 죽게도 만드는 잔인하고 거룩한 신과 같습니다.” 이에 서서히 질식당하는 기분을 느낀 알마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코코슈카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통째 집어삼키려 한다.” 이 어긋남이야말로 두 사람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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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사랑은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부서진다. 코코슈카의 질투는 날이 갈수록 알마를 옥죄었고 결국 알마는 그를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코슈카는 제 발로 기병대에 자원해 전쟁터로 나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총검에 폐를 찔리는 큰 부상을 당해 제대한다. 여기까지가 한 젊은이의 숨 막히는 사랑의 전반부라면 이제 그 사랑이 병으로 굳어 가는 기이한 후반부가 시작된다.
떠난 여인을 잊지 못한 코코슈카는 놀라운 일을 벌인다. 독일 뮌헨의 인형 제작자 헤르미네 모스에게 실물 크기의 ‘알마 인형’을 주문한 것이다. 코코슈카가 모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병적일 만큼 집요하다. 인형의 피부 질감과 몸의 굴곡을 세밀하게 지시했고, 그것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지까지 미리 그려 뒀다. “인형이 도착하면 나는 알마에게 파리에서 주문한 최고급 드레스와 란제리를 입힐 것이다. 알마는 내 고독한 화실의 유일한 여주인이 될 것이다.” 떠난 사람의 자리에 그 사람의 모조품을 세워 상실 자체를 부인하려는 처절한 시도였지만 그 자체로 얼마나 기괴한 일인가.
1919년 봄 마침내 배달된 상자를 열었을 때 코코슈카를 기다린 것은 살아 숨 쉬는 여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 순간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상자를 열고 인형을 만지는 순간 손끝에 닿은 것은 생명의 온기가 아닌 거친 털실과 솜뭉치의 감촉뿐이었다. 비극적인 환멸이자 참담한 코미디였다.” 손끝에 닿은 털실의 감촉이 코코슈카를 환상에서 깨웠다. 인형을 데리고 거리를 거닐기도 하고 오페라의 두 좌석을 마련해 한 자리에 인형을 앉히기도 했지만 그는 곧 자신에 대한 환멸에 휩싸인다.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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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코코슈카는 드레스덴 미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1923년 알마의 기억이 배어 있는 드레스덴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방랑길에 오른다. 이후 7년 남짓 그의 발길은 유럽 전역을 떠돌았고 북아프리카와 중동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집착의 폭풍에서 벗어난 그를 이번에는 역사의 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1931년 잠시 빈으로 돌아왔던 그는 오스트리아를 뒤덮은 파시즘의 그림자를 피해 1934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로 망명했고, 1938년 뮌헨협정이 체코를 나치의 손에 넘기자 다시 영국 런던으로 몸을 피했다. 체코에서 만난 여인 올다 팔코프스카와 함께였다.
런던 망명의 나날은 궁핍했다. 유화 물감을 살 돈이 없어 값싼 수채로 작업해야 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으나 그의 붓은 오히려 더 넓은 세계를 향했다. 코코슈카는 이제 내면의 상처가 아니라 전쟁과 폭력으로 신음하는 인류를 그렸다. 체코에서 만났던 팔코프스카와 런던에서 결혼도 했다. 이때 코코슈카의 나이가 쉰다섯이었으니 젊은 날의 그를 삼켰던 파괴적 에로티시즘이 안정적인 연대와 평온으로 대체된 것이다.
독일 정치인, 만년의 코코슈카에게 앞다퉈 초상화 의뢰
전쟁이 끝난 뒤 코코슈카는 다시 대가의 자리로 돌아왔다. 나치의 과거와 결별하려는 전후 독일의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예전의 퇴폐 예술가에게 초상을 의뢰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1953년에는 잘츠부르크에 ‘시각의 학교’라는 미술학교를 열어 후학을 길렀다. 보는 법을 가르친다는 그 이름 자체가, 평생 남과 다르게 보는 일에 자신을 걸었던 한 화가의 신념을 압축하고 있다. 만년에 스위스 레만 호숫가에 자리잡고 그림과 글을 이어가던 코코슈카는 1980년 아흔셋의 긴 생을 마감했다. 사랑에 삼켜져 죽음의 전장으로 달려갔던 청년이, 두 번의 세계대전과 망명을 건너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을 살아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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