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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설계사’ 빠진 트럼프 정부 온건 보수화하나(종합)

김형욱 기자I 2017.08.20 17:19:11

배넌 경질에 온건 보수 켈리 등 주목
배넌도 장외 노선투쟁 예고 “혼란 지속”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2월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를 “백악관의 비선 실세”라고 보도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을 두둔하는 “여러 편에서 나타난 증어와 편견”이란 발언을 하도록 조언한 인물로 알려졌다.


[이데일리 김형욱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백인우월주의 옹호 발언 논란 끝에 지난 18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정권의 핵심 설계사로 꼽히던 스티브 배넌(63)이 경질됐다. 극우 성향의 그가 빠지면서 백악관의 정책 노선이 온건 보수로 이동하리란 전망도 나온다. 현지 언론은 그러나 노선 투쟁에 따른 혼선은 당분간 이어지리라 전망했다.

◇트럼프 위기 몰리자 경질…내부 권력투쟁 분석도

배넌의 경질은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역대 최저인 34%(갤럽·11~13일 기준)까지 떨어진 가운데 이뤄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2일 벌어진 백인우월주의자 유혈 폭주를 사실상 옹호한 여파가 크다. 이날 버지니아 주(州) 샬러츠빌에서 나치주의에 빠진 한 청년은 반(反) 인종주의 시위대로 차를 몰아 한 명이 죽고 19명이 다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양측(many sides) 모두의 잘못이라며 사실상 KKK단을 비롯한 백인우월주의 단체를 옹호했고 거센 비판을 낳았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발언이 ‘극우 활동가를 지나치게 비난하지 말자’는 배넌의 조언에 따른 것이라고 보도했다. 사실상 책임을 물은 것이다.

내부 투쟁에서 패배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배넌은 본인 스스로 사임하는 것이라고 밝혔으나 그의 경질설은 몇 주 전부터 나왔었다.

당시 출간한 책 조슈아 그린의 ‘데블스 바겐(Devil’s Bargain)‘이 표지에서부터 트럼프 대통령과 배넌을 동등한 관계인양 묘사해 트럼프의 분노를 샀다는 게 화근이었다. 배넌이 사퇴 이틀 전인 이달 16일 인터뷰에서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은 없을 것”이라며 대외적으로 강경 기조를 유지해 오던 트럼프 정권과 다른 목소리를 낸 것도 그의 임기를 앞당겼다는 분석도 있다.

(출처=아마존)


결과적으로 백악관의 실권은 3주 전 취임한 존 켈리 비서실장 등 온건 보수파로 넘어갔다. 대통령의 사위인 제러드 쿠슈너 선임고문과 개리 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허버트 맥마스터 국가안보보좌관 등은 배넌의 견제에 큰 힘을 쓰지 못했으나 배넌의 사임으로 목소리를 키울 기회를 얻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과 켈리 실장이 배넌을 위한 맞춤형 보직이던 수석전략가 후임을 선임할지는 미지수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백악관의 기조가 온건 보수로 기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배넌은 평소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사실상 백악관을 장악한 비선 실세로 군림해 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악관에서 여러 참모와 회의할 땐 침묵하지만 회의 후 대통령과 독대해 의견을 전달하고 이 의견이 대통령의 발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슬람 국가 국민의 미 입국 금지, 미국의 파리기후협약 탈퇴, 12개국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TPP) 이탈 등 논쟁적인 결정도 그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반대 세력도 많았다. 유대인인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도 인종주의적이자 반유대성향의 배넌을 싫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권을 잡게 된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도 “배넌의 술책을 더는 용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안정화할 것” 대 “불확실성 확대” 엇갈린 전망

’설계사‘ 배넌의 사퇴가 백악관에 미칠 영향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일반 트럼프 지지자는 변함없는 지지를 표명한 것은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이 더 힘을 받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미 플로리다 주(州)의 트럼프 지지자 마이크 콜빗(48)은 “배넌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지만 대통령은 이제 중도 우파적 관점에서 정책을 시행해야 할 시점”이라고 평가했다.

의회전문매체 ’더 힐‘은 “해병대 대장 출신인 켈리 비서실장 밑으로 급격하게 질서가 잡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백악관 내 권력투쟁이 온건파의 승리로 마무리돼간다는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배넌의 사퇴에 주변국도 반기는 모양새다. 환구시보(環球時報)를 비롯한 중국 관영 매체들은 배넌의 퇴출로 미국 보호주의 정책 변화와 미중 무역갈등 완화가 예상된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존 켈리(왼쪽부터) 미국 백악관 수석비서와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수석보좌관이 이달 초 워싱턴 백악관에서 걸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AFP


그러나 백악관 내 불확실성은 여전하다는 관측도 만만찮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배넌은 떠났지만 백악관 내 혼란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 정권의 불안정성은 배넌이 아닌 트럼프 대통령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7개월 동안 배넌을 포함한 측근 여섯 명이 각종 구설수 끝에 사임했다고 집계했다. 특히 최근 5주 새 네 명이 사임했다. WSJ는 트럼프 대통령의 부절적한 인사 선임과 그들의 실정 탓에 집권 여당인 공화당이 양원 의석수 절반 이상을 차지해놓고도 그 이점을 활용치 못한다고 분석했다.

배넌은 경질됐지만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핵심 지지세력인 백인우월주의 세력을 내치기 어렵다는 점에서 정책 변화의 폭도 현실적으로 제한적이다. 듀크 전 KKK단 대표는 논란을 낳았던 ’양쪽 모두 잘못‘ 기자회견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대통령이 정직하게 진실을 말하고 좌파 테러리스트를 비판해 줘 감사하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돌아온 포퓰리스트 영웅”…장외 노선투쟁 예고

극우주의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배넌의 ’장외투쟁‘도 또 다른 변수다. 배넌은 사퇴 직후 인터뷰에서 “이제 난 자유”라며 “난 다시 내 무기를 손에 쥐고 반대 세력과 싸우겠다”고 말했다. 브레이트바트의 편집장도 트위터에 ’WAR(전쟁)‘이란 의미심장한 해시태그를 남겼다.

배넌이 설립하고 이끌어 온 브레이브바트는 미국 내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정치 사이트다. 그는 지난해 8월 트럼프 캠프에 합류해 불과 3개월 새 두 배 가까이 벌어졌던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의 격차를 좁히고 결국 트럼프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배넌은 사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던 억만장자 로버트 머서와 손잡기로 했다. WP 등 현지 언론은 둘이 손잡고 새 언론 벤처를 설립해 보수 TV채널을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지목한 반대파가 야당인 민주당이나 뉴욕타임스(NYT), CNN 같은 기성 언론이 될지 백악관 내 온건 보수세력이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의식하듯 “배넌은 브레이브바트뉴스를 통해 더 강력하고 똑똑한 목소리를 낼 것”이라며 “가짜 뉴스(트럼프 대통령이 기성 언론을 폄훼해 부르는 말)에도 경쟁이 필요하다”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 배넌에 대한 응원과 함께 당부의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브레이브바트는 이미 백악관에게 경고장을 날렸다. 배넌의 사퇴 직후 트럼프 대통령 정부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2.0‘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영화배우 출신의 정치 아웃사이더 슈왈츠제네거는 보수 공화당 소속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됐으나 재선 후 진보 성향으로 돌아서며 보수 진영을 실망하게 했다. 배넌의 경질을 극구 반대해 온 스티븐 킹 공화당 하원의원도 NBC와의 인터뷰에서 “배넌의 사퇴로 백악관 내 진정한 보수가 사라졌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배넌의 부재 탓에 그가 내세운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까봐 걱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배넌은 버지니아텍(버지니아 공대)을 졸업하고 조지타운대 국제안보 석사, 하버드대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는 등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받아 온 인물이다. 대학 졸업 후 해군에 입대해 7년 동안 장교로 복무하고 전역 후 골드만삭스에서 일했다. 그는 1990년대 인기 텔레비전 코미디 시리즈 ’사인필드‘에 투자해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그 돈으로 브레이트바트 뉴스를 공동 창업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색을 드러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배넌을 선대본부의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해 지금의 오른팔로 중용했다.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의 지난해 10월 트럼프 캠프 선대본부 최고경영자(CEO) 당시 모습. 지난 18일 경질됐다. 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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