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트립 in 조정화 기자] 묘호는 왕이 돌아가시고 3년 후, 왕의 신주를 종묘를 모실 때 올리는 호칭이다. 조선의 27명 임금의 묘호 끝에는 ‘조’ 또는 ‘종’자를 붙였다, 이 가운데‘조’자가 붙여진 임금은 7명인 데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가 이에 해당한다.
사실 영조, 정조, 순조의 묘호는 원래 ‘종’으로 끝났다가‘조’자로 바뀌었다. 이를 고려하면, 원래부터‘조’자가 붙여진 임금은 4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4명의 임금 가운데 3명의 임금의 왕릉, 태조의 건원릉, 선조의 목릉과 영조의 원릉이 동구릉에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딱히 역사적인 근거는 없을지라도, 왠지 동구릉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지게 한다.
조선의 왕릉은 태조의 능인 건원릉을 빼고는 모두 두 글자로 명명되어 있다. 이러한 태조임금의 건원릉과 이름이 가장 비슷한 이름인 원릉이 동구릉에 있다.. 건원릉의 첫 글자를 빼면 이름이 같은 원릉의 주인공은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임금이다.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든 조선 최대의 비극으로 유명한 영조임금의 원릉은 인조의 계비인 장렬 왕후의 휘릉을 사이에 두고 건원릉과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왕릉의 이름이 비슷한 만큼 두 임금의 왕릉이 조성된 사연도 비슷하다. 사실 왕릉은 왕릉의 주인공만큼 중요한 사람이 그 왕릉에 묻힌 임금의 옥좌를 승계한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태조 건원릉과 영조의 원릉은 닮아있다. 효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가장 큰 효는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왕릉을 조성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중 있는 임금으로 기록되는 태종과 정조는 이런 점에서 효를 행하지 못하였다.
조선 전기의 기틀을 세우고, 세종과 같은 성군을 만들어 낸 태종이라는 잘난 아들을 둔 덕분에 태조의 왕릉은 외롭게 묻혀있다. 개성에 모셔진 태조의 첫째 왕비이자, 어머니인 신의왕후의 능은 참배하고 당일에 올 수 없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모실 수 없었고, 태조가 사랑했던 신덕왕후 옆에 묻히고 싶어 했던 아버지의 뜻은 받들 수 없었던 태종의 결정에 따라 태조는 그렇게 혼자 잠들어 있다. 가을이면 억새를 봉분에 이고서 더욱 쓸쓸함을 자아내면서 말이다. 태종의 심경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가을에 건원릉에 와보면 태조의 능은 더욱 쓸쓸해 보인다.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왕릉이 조성된 또 하나의 임금은 영조임금이다. 영조가 있는 원릉의 현재 자리는 정조임금이 할아버지의 소망을 외면하고서 결정한 위치이다. 정조에게 아버지를 뒤주에 가두어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나 자신의 정치적 모델이었던 할아버지 영조는 분명 애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사실 영조는 후사 없이 돌아간 첫 번째 부인 정성왕후가 있는 서오릉의 홍릉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고 후일 자신이 그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고, 반대쪽인 동구릉의 원릉에 조성하였다.
조선의 최대 왕릉인 9개의 능이 있는 동구릉에 와보시라. 태조의‘건원릉’은 조선 전기, 영조의‘원릉’은 조선 후기 조선왕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떠올려 보시라. 고향은 함흥이나, 신덕왕후의 정릉에 함께 묻히고자 했던 아버지 뜻과 달리 아버지 태조를 건원릉에 모신 태종임금의 이야기와, 할아버지 영조의 뜻에 따라,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가 있는 서오릉에 함께 모시지 않고 굳이 동구릉의 원릉에 모셔놓은 정조임금의 변명을 한 번쯤 귀담아들어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