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
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역임. 육군 및 해군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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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을 ‘투키디데스의 함정’(Thukydides’ Trap)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지난 2018년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가 발간한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의 부제로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지난 500년간 투키디데스의 함정 상황이 16번 발생했고, 그중에서 한국전쟁 포함, 12번의 전쟁이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투키디데스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출신의 장군이자 역사가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신흥 강국 아테네의 성장에 기존 패권국 스파르타가 위협을 느끼면서 전쟁으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했다.
◇아테네의 ‘성장’, 스파르타의 ‘불안’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의 워-스트래티지 3강은 지난 2강에서 다룬 페르시아 전쟁(BC 490~BC 450) 직후에서 출발했다. 최강국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승리를 일궈낸 아테네는 그리스의 신흥 패권국으로 부상한다. 민주정을 기반으로 하는 아테네는 그리스의 예술, 학문, 경제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다. 당시 아테네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 파르테논 신전이다.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손에 10년에 걸쳐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가 구현한 그리스 건축의 결정체이다. 신전을 둘러싼 기둥은 대등한 힘으로 공동의 구조물을 지탱하는데, 이는 시민들의 공동체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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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입장에서 민주와 평등을 바탕에 둔 아테네의 성장은 불안요소였다. 스파르타는 농노 경제를 통해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다수의 농노 ‘헬로트’(Helots)가 거의 모든 생산을 담당하고, 이를 소수의 지배계급 ‘스파르티아테스’(Spartiates)가 관리하는 형태였다.
스파르타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쉽게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 보수적인 국가였다. 위협적인 존재였던 아테네와도 BC 446년 30년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그리스 도시 국가 간의 갈등은 오히려 확대된다. 아테네의 성장을 질시한 코린토스는 아테네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했고 BC 433년 과두정과 민주정 지지자들 간에 내전이 벌어진다. 내전이 벌어질 때마다 과두정 지지자들은 스파르타와 코린토스에 도움을 청했다. 코린토스는 보수적인 스파르타를 향해 아테네를 공격하지 않으면 동맹을 끊겠다고 압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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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전쟁의 시작…“한방은 없었다”
일련의 사건들이 얽히면서 BC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전쟁에 들어가자 정반대의 전략을 구사했다.
스파르타는 현대전의 특수부대 격인 중장보병으로 지상공격을 감행했고 동맹국 코린토스를 통해 해상을 장악했다. 또한 아테네 주변의 반(反) 아테네 반란을 조장하는 등 직접 전략과 간접 전략을 동시에 활용한다.
한편 아테네는 장기전을 통한 평화협정을 꾀했다. 아테네의 명장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 중장보병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방벽을 활용한 방어전을 펼치는 동시에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군을 후방 공격과 보급에 적극 활용한다.
최 교수는 “양측 전략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어느 쪽도 전쟁을 끝장낼 확실한 한 방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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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의 탁월한 지도자 둘이 사라지자 전쟁은 급속도로 확산한다. 아테네에선 강경파가 득세했다. 미틸레네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여인과 아이는 노예로 팔아넘긴다. 또 스파르타 동맹국 암브라시아를 공격해 점령하는 과정에서 양국 간 갈등이 심화했다. 특히 스팍테리아 지역에선 귀족 자제 120명을 포함한 스파르타 중장보병 300명이 포로가 됐다.
최 교수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평화협정 약속 사항을 지킬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며 “페리클레스와 아르키다모스 2세는 자신들의 의지와 능력으로 약속을 지켰지만, 당시에는 카리스마 있는 통치자가 없어 각 동맹국 내 의견을 조율하고 통합할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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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0년간의 소모전 끝에 BC 421년 30년짜리 ‘니키아스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에는 스파르타가 먼저 움직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북부 보이오티아와 동맹을 맺고 아테네를 압박한다. 아테네는 아르고스, 엘리스, 만티네이아 등 민주정 국가와 조약을 맺어 대응했다.
평화협정이 붕괴하자 양국은 기존 전략을 대폭 수정한다. 아테네는 아르고스 중심의 대(對) 스파르타 동맹을 결성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파르타 중장보병과 전면전을 벌인다. 하지만 아테네는 스파르타 중장보병과의 전투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었고 동맹의 중심이었던 아르고스가 이탈하면서 만티네이아와 엘리스가 다시 스파르타의 품으로 들어갔다.
스파르타는 이전 전쟁에서 칼을 겨눴던 페르시아와 손을 잡고 해군을 양성하는 전략을 택했다. 페르시아는 전후 소아시아 관할권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함선과 노꾼 임금을 지원하고 정규군 대신 유연한 비정규군을 파견해 시칠리아 원정에 나선 아테네를 격파한다. 이 원정에 동원된 아테네 시민만 1만 5000명에 달했는데, 시칠리아 원정 실패를 계기로 아테네는 내리막을 타고 결국 BC 404년 항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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