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
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역임. 육군 및 해군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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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가 그리스 변방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른 나이는 불과 20세. 하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그리스에서 지금의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까지 복속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 그리스인들이 현대까지 존경을 보내는 알렉산더 대왕은 어떻게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대제국을 일굴 수 있었을까.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는 ‘위대한 생각’ ‘워-스트래티지’ 4강을 이탈리아 폼페이에서 발견된 타일 모자이크 작품으로 시작했다. 기원전(BC) 300년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모자이크엔 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 국왕 다리우스 3세의 전투 장면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최 교수는 “알렉산더 대왕을 공적 대신 그림 속 얼굴만 보고 판단해 달라”며 “두려움에 찬 눈동자에선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 영웅 알렉산더가 아닌 전장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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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는 필립 2세 통치 이전까지 그리스 변방의 2류 국가에 불과했다. 당시 그리스는 군사력의 스파르타와 문화력의 아테네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기였다. 필립 2세는 마케도니아의 힘을 키우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력 강화에 나섰다.
마케도니아가 자신 있던 분야는 기병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엔 말에 장착할 수 있는 등자나 안장 같은 장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기병은 주로 정찰 일을 맡고 전투 중심에는 서지 못했다.
필립 2세는 기병을 전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귀족 자제들을 집중 훈련시켜 ‘헤타이로이’(Hetairoi)라는 기병부대를 창설한다. 헤타이로이는 ‘동료’라는 뜻으로 귀족 자제들을 단순한 병력의 부하가 아닌 동지로 삼고 굳게 단결하겠다는 필립 2세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필립 2세는 효율적 방법으로 보병부대도 탈바꿈했다. 당시 그리스의 보병부대 운용법은 밀집대형을 짜 창으로 공격하는 ‘팔랑크스’(Phalanx) 전술이었다. 변화의 핵심은 창이었다. 타국의 중장보병은 3m를 넘지 않는 창을 지녔지만, 마케도니아의 중장보병은 6m가 넘는 거대한 창 ‘사리사’(Sarissa)로 무장함으로써 손쉽게 전술 우위에 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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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는 “당시 마케도니아 군대는 전쟁 때만 동원하는 시민군이 아니라 직업군인이 중심이 돼 타 국가의 시민군은 따라올 수 없는 전술적 기동력을 갖췄다”며 “이를 기반으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강국으로 부상했다”고 설명했다.
필립 2세가 알렉산더에게 물려준 것은 강한 군대와 통합된 그리스뿐만이 아니었다.
알렉산더의 어린 시절 스승은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와의 만남을 통해 단순히 몸과 용기로 싸우는 군인이 아닌 이성과 절제의 중요성을 아는 군주로 성장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조화와 균형의 힘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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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2세는 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내 아들아, 너는 반드시 너의 야망에 걸맞은 더 큰 나라가 필요하다”라며 감격한다.
필립 2세는 또 알렉산더가 향후 대제국을 다스릴 때 함께할 동료이자 친구들을 만들어준다. 알렉산더와 그의 친구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밑에서 동문수학한다. 12~13세 소년들이 함께 공부하고, 훈련받으며 마케도니아를 이끄는 엘리트 집단으로 성장한다. 이들 중엔 알렉산더 사후 이집트 지역을 다스리게 되는 프톨레마이오스도 포함돼 있다.
알렉산더는 이런 철저한 엘리트 교육을 기반으로 16세부터 전장에 나선 필립 2세를 대신해 섭정을 하고 18세에는 직접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참여해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연합군을 격파한다.
알렉산더가 스무 살이 되던 BC 336년 필립 2세는 근위병에게 암살당한다. 예상치 못한 젊은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알렉산더는 오히려 페르시아 원정이라는 그리스 도시국가 동맹 전체의 목표를 수행할 준비에 나선다.
광활한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정벌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알렉산더는 모든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큰 규모의 전투만을 승리로 이끌어 상대의 저항의지를 꺾는 전략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알렉산더 대왕의 ‘대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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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전투는 BC 334년 ‘그라니코스 전투’다. 강을 끼고 벌어진 이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강 상류로 올라가 건너야 한다는 부하들의 제안을 무시하고 자신의 기병대로 바로 도강해 적의 허를 찔러 승리를 이끌어냈다.
1년 뒤 BC 333년 벌어진 ‘이소스 전투’에서는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의 11만 대군과 알렉산더군이 격돌한다. 알렉산더는 중앙의 다리우스를 노리기 위해 중장보병으로 틈을 만들어 낸다. 페르시아 좌익과 중앙에 발생한 틈을 정예기병 헤타이로이로 쐐기 대형을 짜서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다리우스는 달아난다. 일명 ‘모루와 망치’ 전략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은 2년 뒤 BC 331년에 ‘가우가멜라 전쟁’으로 마무리된다.
페르시아 원정 과정에서 알렉산더는 중앙을 돌파하는 효율적인 행군이 아닌 해안을 따라가는 경로를 이용한다. 이 역시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원정을 성공으로 이끈 대표적인 전략 중 하나다.
5만이 넘는 병력에 보급을 하기 위해선 해안에 붙어 뒤따르는 120척의 함대를 이용해야 했다. 보급망 없이 섣불리 내륙으로 들어가면 고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알렉산더는 해안을 따라가면서 페르시아의 서쪽 주요 거점을 모두 점령한다. 페르시아가 함대를 활용해 서쪽 그리스 본토를 직접 공격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다.
최 교수는 알렉산더를 통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군사적 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불확실성 속에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해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가 군사적 천재다”라며 “알렉산더는 정확하게 공격하는 타이밍을 잡고 적을 궤멸시키는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알렉산더는 도시국가들끼리 싸우는 것이 삶의 전부였던 그리스인들의 세상을 그리스를 넘어 동방으로 넓혔다”며 “새로운 세계를 꿈꿨던 알렉산더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리스 서쪽으로까지 영토를 넓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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