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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가 뭐길래…공수처법 놓고 21대 국회 첫 등장

박태진 기자I 2020.12.11 11:05:22

김기현, 3시간 무제한 토론…野, 국정원법서도 진행
美·英서도 시행…한국, 2012년 국회 선진화법에 부활
민주당, 4년전 테러방지법 반대해 역대 최장 기록
故김대중 대통령 5시간 넘겨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이데일리 박태진 기자] 2020년 마지막 정기국회에서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등장했다. 필리버스터란 의회 안에서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합법적 수단으로 의사 진행을 지연시키는 무제한 토론을 말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영국·프랑스·캐나다 등에서 시행하고 있다. 이는 의석수가 많은 여당보다 수적 열세에 있는 야당에서 주로 쓴다. 국내에서 필리버스터는 1948년 10월 2일 국회법이 제정된 이래 1964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처음 도입했지만, 이후 1973년 국회의원의 발언시간을 최대 45분으로 제한하는 국회법 개정으로 사실상 폐기됐다가 2012년 국회 선진화법 개정으로 부활했다.

[그래픽=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 선진화법 개정 후 4번째 진행

2012년 개정된 국회법(제106조2)에 따르면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하려는 경우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하고, 의장은 해당 안건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실시할 수 있다. 일단 해당 안건에 대한 무제한 토론이 시작되면 의원 1인당 1회에 한 해 토론을 할 수 있고, 토론자로 나설 의원이 더 이상 없을 경우 무제한 토론이 종결된다. 또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무제한 토론의 종결을 원하고 무기명 투표로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종결에 찬성할 경우에도 무제한 토론이 마무리된다.

그러나 무제한 토론의 효과는 해당 회기에 국한되므로, 무제한 토론을 하던 중 회기가 종료되면 해당 법안은 자동으로 다음 회기 첫 본회의 표결에 부쳐진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올해 정기국회 마지막날인 지난 9일 본회의에서 3시간에 걸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을 했다.(사진=연합뉴스)
현재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20대 국회에 이어 21대에서도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 들었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김 의원은 서두에서 헌법 1조를 언급하며 “거대 여당과 청와대가 합작해 민주주의를 짓밟고 헌법을 유린하고 있다”면서 “모든 권력은 문빠(문재인 대통령 열렬 지지층)로부터 나온다”라며 정부·여당를 맹비판했다.

하지만 김 의원의 단독 필리버스터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날 오후 9시부터 시작된 김 의원의 필리버스터는 자정에 자동 종결됐다. 21대 정기국회 회기가 이날까지였기 때문에 3시간짜리 시한부 무제한 토론이었던 셈이다. 국민의힘은 정기국회 회기 내 처리라는 더불어민주당의 1차 목표는 저지했지만, 10일부터 다시 12월 임시국회가 소집돼 있어 지연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결국 공수처법 개정안은 임시국회 첫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103석으로 수적 열세에 놓인 국민의힘은 10일에는 국가정보원법 전부개정법률안, 11일에는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의 국회 통과 저지를 위해 필리버스터를 진행 중이다. 10일에는 이철규 의원이 나서서 국정원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하는 무제한 토론을 진행했다. 이후 같은 당 조태용 의원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국민의힘 초선의원 58명도 이번 필리버스터에 참여하기로 했다.

필리버스터는 소수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도 참여할 수 있다. 민주당에서는 김병기·홍익표·김경협·오기형 의원이 나서서 국정원법 개정안에 찬성하는 무제한 토론으로 맞불을 놓겠다는 전략이다.

21대 국회의 경우 민주당이 180석(전체 의석수의 5분의 3)이라는 점에서 필리버스터 무력화도 가능하다. 박병석 국회의장 등 일부를 제외하더라도 정의당과 열린민주당, 무소속 여권 성향 의원을 포함하면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 전술을 충분히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야당의 의사표시를 존중하겠다”며 종결하지 않기로 했다.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국정원법 개정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 이종걸 전 의원 개인 최장 기록 세워

이번 김기현 의원의 필리버스터는 2012년 국회 선진화법 도입 후 네 번째 사례로 기록됐다.

국회 선진화법 개정 이후 첫 필리버스터는 민주당에서 진행했다. 이 당은 2016년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으려고 이 카드를 꺼냈다. 그해 2월 23일 김광진 전 의원부터 다음 달 2일 당시 원내대표였던 이종걸 전 의원까지 38명이 총 192시간 27분간 반대 토론에 나서 세계 최장 기록을 세웠다. 특히 이 전 의원은 12시간 31분으로, 헌정 사상 개인 최장 기록을 세웠다. 이전까지 국내에서 가장 길었던 필리버스터는 1969년 8월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3선개헌을 막기 위해 10시간 15분 동안 발언한 것이었다.

해외의 경우 현재까지 최장 기록은 1957년 미국 의회에 상정된 민권법안을 반대하기 위해 연단에 오른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이 24시간 18분 동안 연설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23일에는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이 선거법 개정안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의결을 막으려고 3년 만에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현재 국민의힘 원내대표인 주호영 의원이 이날 오후 9시 50분부터 3시간 59분 동안 발언했는데, 민주당 의원들이 ‘맞불’ 토론에 나서 총 15명, 50시간 10분간의 필리버스터가 이어진 바 있다.

자유한국당은 같은 달 27일 오후 9시 26분에는 공수처법 처리를 두고 또 다시 필리버스터에 돌입했다. 이때에도 여야 의원 13명이 참여해 26시간 34분 동안 진행된 뒤 29일 자정에 막을 내렸다.

한국 정치사에 남을 만한 명장면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원 시절 필리버스터가 꼽힌다. 당시 야당 초선 의원이었던 그는 1964년 4월 21일 동료 의원(김준연 자유민주당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막기 위해 임시국회 회기 종료까지 5시간 19분 동안 열변을 통해 결국 체포동의안 처리를 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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