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edaily 리포트)아베와 노무현, 그리고 변양균

하정민 기자I 2007.09.12 16:30:54
[이데일리 하정민기자] `2차 대전 후 사상 최연소 총리`라는 기치 아래 화려하게 등장했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집권 1년 만에 조기 퇴진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지난 7·29 참의원 선거 패배가 원인이지만, 속내를 파고들면 측근들의 잇따른 부정부패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제부 하정민 기자는 최근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스캔들의 주인공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관계도 아베 총리와 그 측근 관계와 비슷하다고 본답니다. 

선거 참패 이후에도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며 버텨왔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결국 안팎의 사퇴 압력에 굴복했습니다. 집권 초기 70%에 달했던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최근 30%대까지 급락했습니다. 측근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도덕성에 결함이 생긴 것이 사실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작년 9월 취임한 아베 총리는 불과 1년 동안 무려 네 명의 농수산상을 기용했습니다. 특히 아베 내각의 첫 번째 농수산상이었던 마쓰오카 도시카쓰는 정치자금 문제로 여론의 거센 질타를 받다 지난 5월 말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해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이어 등장한 아카기 노리히코 전 농수산상, 엔도 다케히코 전 농수산상 역시 모두 정치자금 비리 의혹으로 조기 퇴진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자살한 마쓰오카 도시카쓰 전 농수산상은 2차 대전 이후 재임 중 자살한 일본 최초의 장관입니다. 아베 총리 취임 후 속속 터져 나오는 정치자금 의혹에는 언제나 마쓰오카 전 농수산상이 끼어 있었지만, 아베 총리는 늘 강경한 표정으로 "별 문제없다"란 말만 반복했습니다.

마쓰오카 전 농수산상은 지난 1997년부터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이란 단체에서 아베 총리와 함께 정치적 동지 관계를 맺어온 인물입니다.
 
그가 단순 퇴진이 아니라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한 것은 자신을 장관으로 발탁해 준 `주군` 아베 총리에게 의리를 다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아베 총리가 유난히 마쓰오카 전 농수산상 비호에 앞장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쯤 되면 이 둘과 비슷한 역학관계를 가진 한국의 인물들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바로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가짜 박사` 신정아 씨에 대한 변양균 전 실장의 비호 의혹이 처음 불거지던 지난달 31일 노 대통령은 "요즘 깜도 안 되는 의혹이 많이 춤을 추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현 정권에는 `정권 실세`가 없으며, `소설같은 얘기`가 난무하고 있다고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깜`도 안 되는 그 `소설`같은 의혹은 불과 며칠 사이에 정권 전체를 뒤흔드는 `사실`임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노 대통령이 지난 11일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변 전 실장 사건과 관련, "할 말이 없게 됐다. 난감하게 됐다"고 말하는 지경에 몰렸습니다. 변양균 전 실장과 관련해 그토록 자신만만해하던 노 대통령이었지만 속속 드러나는 사실 앞에서는 천하의 대통령이라 할 지라도 자세를 낮출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날 간담회는 `반성`보다는 `변명`에 치중했을 뿐이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국민들의 분노도 여전합니다. 일단 몸을 낮추긴 했지만 대통령은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고가 있다고 그것을 바로 권력누수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은 노 대통령이 변 전 실장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한 마디로 `미안하다, 몰랐다`는 거죠.

잘 알려진대로 참여정부는 대통령과 측근들의 도덕성을 현 정권의 가장 큰 덕목으로 내세웠습니다. 노 대통령은 줄곧 "현 정권은 대통령 친인척이나 측근 비리가 없기 때문에 김대중·김영삼 정권과 다르며, 정권 말기의 레임덕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정권의 마지막 보루였던 도덕성은 심각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변 전 실장과 신정아 씨의 스캔들을 김영삼 정부 시절 재미 로비스트로 활동했던 린다 김과 이양호 전 국방장관의 사건에 비유하지만 이번 사태는 `린다 김 사건`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부적절한 관계의 파장이 국방 사업에만 그친 `린다 김 사건`과 달리, 신정아 스캔들은 정권 말기의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일파만파 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양호 전 장관은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이 아니었지만, 변 전 실장은 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현 정권에서 승승장구한 인물입니다.

특히 변 전 실장이 신정아 씨의 동국대 교수 임용과 허위 학력 의혹 무마,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선임 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건 전형적인 `권력형 비리`이기 때문에 `린다 김 사건`과는 엄연히 무게감이 다릅니다.

노 대통령이 반드시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의 최측근인 변 전 실장을 감싸며 `깜도 안되는 의혹`이라고 국민 판단을 오도했던 경솔함에 대해서는 분명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할 말이 없다"는 말로 넘어갈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죠.

가만 살펴보면 측근에 대한 대통령의 부적절한 비호가 한국과 일본에서만 발생하는 건 아닙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역시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 폴 울포위츠 전 세계은행 총재, 칼 로브 백악관 부 비서실장, 앨버트 곤잘레스 전 법무장관 등 측근 단속을 제대로 못해 엄청난 비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측근을 감싸다 측근은 자살하고, 자신은 총리 직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아베 전 총리의 모습은 현 정권이 무엇을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지 잘 알려줍니다. 한국이든 외국이든 정권의 명운은 언제나 `도덕성`이 결정짓는 법이니까요.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