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복수지만…8년간 관객 웃고 울린 '조씨고아'[알쓸공소]

장병호 기자I 2023.12.22 13:00:00

중국 원나라 시대 잡극 원작 연극
2015년 초연 이후 5차례 무대 올라
권력 다툼에 휘말린 평범한 사람
원한·분노·증오 없는 세상 향한 메시지

‘알쓸공소’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공연 소식’의 줄임말입니다. 공연과 관련해 여러분이 그동안 알지 못했거나 잘못 알고 있는, 혹은 재밌는 소식과 정보를 전달합니다. <편집자 주>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명불허전, 또는 백문이 불여일견. 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다시 본 뒤 떠오른 말입니다. 한 번 관람한 뒤에도 다시 보고 싶은 공연은 많지 않습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그런 작품입니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중국 원나라 시대의 잡극 작가 기군상이 쓴 고전 소설 ‘조씨고아’를 연출가 고선웅이 각색, 연출한 작품입니다. 중국 진나라를 배경으로 권력에 눈이 먼 대장군 도안고가 경쟁자로 여기던 조순 대감과 그의 가문의 멸족을 자행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조씨 가문의 문객인 시골 의사 정영이 억울하게 멸족당한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 조씨고아를 살려낸 뒤, 20년이 지나 복수에 나서는 과정을 다룹니다.

2015년 초연부터 호평을 받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국립극단 대표 레퍼토리로 여러 차례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번이 다섯 번째 무대로 이달 초 누적 공연 100회 달성의 진기록도 세웠습니다. 장기 공연이 쉽지 않은 연극으로서는 이례적인 기록입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힘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단)
처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본 것은 2017년이었습니다. 그때는 작품이 전하는 강렬한 희로애락에 사로잡혀 그저 웃다가 울며 본 기억이 있습니다. 2020년에 다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만났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공연을 제대로 즐기기 힘들었고요. 3년 만에 다시 공연을 보면서 인물들의 감정, 그리고 작품이 담은 주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이 이토록 오래 사랑 받는 이유는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심엔 주인공 정영(하성광 분)이 있습니다. 정영은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지극히 평범한 서민입니다. 마흔이 넘어 뒤늦게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가진 정영은 권력에 대한 욕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죠.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번엔 정영의 첫 등장부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임신한 아내(이지현 분)와 함께 “니나니 나니노~” 노래를 부르며 해맑게 등장하는 모습이 유독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이번에 다시 본 작품은 평범한 사람이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으로 허망한 인생을 살게 되는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조씨고아를 낳은 공주(우정원 분)의 부름을 받은 정영은 공주로부터 조씨고아를 대신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평범한데다 착한 정영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정영만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조씨 가문을 위해 목숨을 스스럼없이 내놓습니다. 마치 그것이 옳은 일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죠.

정영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대신 희생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정영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작품을 정영의 아내를 통해 이런 질문을 관객에게 던집니다. ‘복수’를 제목에 내걸었지만, 2막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복수도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20년이 지나 비로소 빛을 본 복수는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그 죽음은 또 다른 복수로 이어지겠죠. 정영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른 채 해맑던 모습을 읽어버린 정영을, 죽은 이들은 그를 외면한 채 지나갈 뿐입니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 무대, 한바탕의 짧은 꿈”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단)
우리가 정영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요. 생각해 보면 지금 세상도 정영이 살았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 잘못된 믿음이 존재하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권력을 위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1막의 마지막 장면, 모두가 죽고 떠난 뒤 홀로 조씨고아를 떠안은 정영은 “이 까짓 게 무어라고!”라고 외치며 눈물을 쏟아냅니다. 우리도 “이 까짓” 것 밖에 안 되는 일에 휘말린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라. 북소리 피리 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면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두 번 등장하는 이 대사는 작품의 메시지를 잘 보여줍니다. 원한, 분노, 증오, 그리고 복수가 없는 행복한 세상을 함께 살자는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훈적이지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이를 관객에게 공감시킵니다. “니나니 나니노~”라고 노래하며 해맑던 정영과 그의 아내의 일상이 계속 이어지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25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합니다. 만약 이번 기회를 놓쳤다면, 언젠가 다시 돌아온 공연은 꼭 관람하시길 바랍니다. 몇 년 뒤에도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전하는 메시지와 작품의 힘은 변함없을 테니까요.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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