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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률 경쟁: "호주의 실험, 시장이 연금을 키우다"[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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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기자I 2026.09.15 0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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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연금 놓고 민간 경쟁하는 '슈퍼애뉴에이션' 만들어
금융기관·비영리기관·기업 등 서로 수익률 경쟁
수수료 낮추고 서비스 혁신하는 분위기 형성
한국, 수익률이 아닌 기업과의 영업으로 경쟁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퇴직연금, 어느 은행으로 하는 게 좋아요?” “아무 데나 하세요. 어차피 수익률은 다 똑같아요.”

개인의 계좌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계좌 안의 돈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그 돈을 운용하는 시장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앞 장까지 우리는 개인에게 넘어온 책임, 그 책임을 덜어줄 기본값, 그리고 이직해도 돈을 담아둘 그릇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질문은 그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그 그릇에 담긴 돈은 어떤 경쟁과 규율 속에서 불어나야 하는가?

이것이 한국 직장인들의 서글픈 상식입니다.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수십 개의 퇴직연금 사업자가 있지만, 이들은 수익률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은행에서 대출받으셨으니 퇴직연금도 가입해 달라”며 기업 인사팀을 상대로 영업 전쟁을 벌입니다. 근로자의 수익률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익률이 좋든 나쁘든, 주어지는 상벌이 없습니다. 이것은 ‘경쟁’이 아니라 ‘담합’에 가까운 평화입니다. 앞서 살펴본 ‘기형적 삼각관계’가 시장 전체 차원에서 반복되는 셈입니다 — 경쟁의 화살표가 근로자가 아니라 기업 담당자를 향해 있으니, 사업자들끼리 굳이 수익률로 싸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반구의 호주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곳의 연금 기금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수익률이 경쟁사보다 낮으면 우리는 죽는다”는 공포 속에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도대체 호주는 어떻게 연금 시장을 이런 ‘전쟁터’로 만들었을까요? 이 장에서 중요한 것은 기금이라는 형식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 위에 만들어진 경쟁, 그리고 성과가 나쁘면 시장에서 밀려나는 퇴출의 규율입니다.

1983년 캔버라, “임금을 줄 테니 연금을 다오”

1983년, 호주 경제는 벼랑 끝에 있었습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속에서 노동조합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을 예고했습니다. 그때 밥 호크 총리와 노동당 정부는 노조 지도부를 은밀히 만났습니다. 그리고 캔버라에서 역사적인 대타협, 일명 ‘The Accord(협약)’를 제안합니다.

“임금 인상을 자제해 달라. 대신 기업들로 하여금 임금 인상분의 일부를 강제로 떼어 노동자들의 개인 연금 계좌에 넣게 하겠다.” 이렇게 시작된 강제 적립률은 1992년 「퇴직연금보장법(Superannuation Guarantee Act)」으로 법제화되면서 3%에서 출발해, 2002년 9%, 그리고 2025년 7월부터 12%까지 단계적으로 올랐습니다. 이것이 세계적인 연금 제도로 칭송받는 호주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의 탄생 비화입니다. 여기서 호주 정부는 아주 중요한 결단을 내립니다. 이 막대한 돈을 국가가 독점하지 않고, 민간 시장에 풀어서 서로 경쟁하게 만들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 그리고 ‘진짜 패자’는 누구인가

호주 정부는 판을 깔았습니다. “누구든지 기금을 만들어라. 그리고 노동자들의 선택을 받아라.” 그러자 링 위에 세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1. 영리 기금(Retail Fund) — 은행과 보험사가 만든 금융 골리앗(한국의 금융기관개방형과 닮은 자리)

2. 산업 기금(Industry Fund) — 노조와 고용주 협회가 공동으로 만든 비영리 기금(한국의 연합형과 닮은 자리)

3. 기업 기금(Corporate Fund) — 개별 기업이 자기 직원만을 위해 만든 기금(한국은 도입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

초기에는 회사가 알아서 챙겨주는 ‘기업 기금’이 유리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승패는 명확해졌습니다. 도태된 것은 놀랍게도 기업 기금이었습니다. 이유는 냉혹했습니다. 한 회사의 직원만으로는 자산 규모가 작아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이사회가 회사 임원으로 채워지다 보니 독립적인 운용이나 과감한 투자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숫자로도 선명합니다. 한때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기업 기금은 2023년 기준 시장 점유율이 2%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사실상 멸종했습니다.

현재 호주 시장은 산업 기금과 영리 기금의 치열한 양강 구도입니다. 산업 기금이 “주주 몫을 아껴 가입자에게 돌려준다”는 원칙으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며 시장을 주도하자, 이에 질세라 영리 기금들도 수수료를 낮추고 서비스를 혁신하며 반격하고 있습니다. 결국 승자는 특정 기금이 아니라, “수익률이 나쁘면 고객이 떠난다”는 공포가 만든 경쟁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는 연금 가입자였습니다.

경쟁은 퇴출까지 있어야 완성된다

그러나 호주의 진짜 힘은 “여러 기금이 경쟁한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쟁이 말뿐이 되지 않게 만드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호주는 MySuper(마이슈퍼, 수수료가 낮고 구조가 단순한 표준화된 디폴트 상품 제도)를 통해 기본 상품을 장기 투자 상품으로 단순화했고, 나아가 ‘Your Future, Your Super(YFYS, 성과 미달 기금을 가입자에게 알리고 신규 가입을 차단하는 연례 성과 평가 개혁)’를 통해 엄격한 성과 테스트를 도입했습니다.

이 테스트의 원리는 냉정합니다. 각 상품의 실제 성과를 자산배분에 맞춘 벤치마크와 비교합니다. 장기간 기준으로 성과가 기준보다 일정 수준 이상 낮으면 실패로 판정됩니다. 한 번 실패하면 가입자에게 “당신이 들어 있는 상품은 성과 테스트에 실패했다”는 통지를 보내야 합니다. 두 해 연속 실패하면 그 상품은 신규 가입자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사형 선고는 아니지만, 연금 시장에서는 사실상 퇴출 압력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진짜 경쟁입니다. 단순히 상품을 많이 늘어놓는 것이 경쟁이 아닙니다. 광고를 많이 하고, 영업망을 넓히고, 기업 담당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도 연금 가입자를 위한 경쟁이 아닙니다. 연금 시장의 경쟁은 성과가 측정되고, 비용이 비교되고, 실패가 공개되고, 반복 실패자가 새 가입자를 받을 수 없을 때 비로소 작동합니다.

한국의 현실 — 경쟁의 화살표가 빗나가 있다

이제 한국을 돌아봅시다. 한국에도 은행, 증권사, 보험사, 운용사, 수많은 상품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경쟁이 없는 시장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경쟁의 방향이 틀어져 있습니다. 가입자의 장기 수익률을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의 영업 관계를 두고 싸웁니다. 돈의 주인은 근로자인데, 계약의 열쇠는 기업이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형 기금형 제도 논의에서 단독 기업형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노사정 합의는 대기업이 단독으로 기금을 만드는 방식을 도입하지 않는 쪽으로 이미 방향을 잡았습니다. 호주에서 기업 기금이 도태된 경험은 중요한 참고 사례였습니다. 한 회사의 직원만으로는 규모의 경제를 만들기 어렵고, 기금이 회사 지배구조에서 자유롭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주의할 것은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기금형이 답이다”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붙잡아야 할 결론은 더 앞선 것입니다. 퇴직연금 시장에는 성과를 비교하는 기준, 실패를 공개하는 규칙, 반복 실패자를 밀어내는 퇴출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금융기관개방형이든, 연합형이든, 공공개방형이든, 계약형이든, 경쟁의 화살표가 기업 담당자가 아니라 가입자의 노후 자산을 향하게 됩니다.

기업에게 연금 운용이라는 무거운 짐을 다시 지우자는 뜻도 아닙니다. 대신 수탁자 책임을 지는 전문 주체들이 링 위에서 수익률과 비용으로 싸우게 해야 합니다. 1983년 캔버라의 실험과 이후 호주의 성과 테스트가 증명하듯, 시장의 승자는 ‘사업주가 굴리는 돈’이 아니라 ‘성과로 검증받는 전문가가 굴리는 돈’입니다.

경쟁을 통해 호주의 퇴직연금은 발전했지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겪게 됩니다. 이직할 때마다, 혹은 새로운 기금에 가입할 때마다 계좌가 늘어나는 바람에 국민들이 ‘다중 계좌의 늪’에 빠진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기술적 혁신, ‘스테이플링’이 어떻게 연금의 파편화를 막았는지, 그리고 한국은 왜 여전히 ‘계좌 뺑뺑이’를 돌리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수익률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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