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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품은 숲 걷고, 왕 머문 산정서 더위 식혀…폭염 걱정 없는 '평창'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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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록 기자I 2026.07.24 06: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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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더위 피해 찾아간 강원도 평창
삶의 번잡함 떨쳐내고 오라고
조용히 지켜보는 전나무길 지나
산문 너머 1500년 고찰 월정사엔
신라와 조선의 역사가 생생
케이블카 타고 3.7km '쑹'
어느듯 구름 위, 백두대간 발아래
우리 삶같은 주목의 고단함
바람에 실려 저 너머로

발왕산 정상에 설치된 ‘기(氣) 스카이워크’. 산 능선 밖으로 길게 뻗은 전망시설에서 평창의 산군과 리조트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발왕산 정상에 설치된 ‘기(氣) 스카이워크’. 산 능선 밖으로 길게 뻗은 전망시설에서 평창의 산군과 리조트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평창(강원도)=글·사진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여름 휴가지는 대개 물을 따라 정해진다. 바다로 가고, 강과 계곡을 찾는다. 평창에서는 여기에 높이가 더해진다. 굽이진 길을 따라 고도가 오를수록 차창 밖 공기가 달라지고, 산으로 한 겹 깊이 들어설 때마다 한낮의 열기는 한 발씩 물러난다. 물론 바다는 없다. 대신 하늘을 가릴 만큼 짙은 숲과 산에서 막 흘러내린 계곡물, 한여름에도 찬 기운이 머무는 높은 능선이 있다. 계곡 곁을 걷다가 나무 그늘에 앉고, 더위를 조금 더 멀리 두고 싶으면 구름 가까이로 오르면 된다. 평창에서의 피서는 숲과 물, 고도를 옮겨 다니며 여름의 온도를 낮추는 여행에 가깝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두고 평창의 여름 속으로 들어간다.



월정사 일주문에서 사찰 입구로 이어지는 전나무숲길. 굵은 전나무와 활엽수가 빽빽하게 서 있어 한낮에도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월정사 일주문에서 사찰 입구로 이어지는 전나무숲길. 굵은 전나무와 활엽수가 빽빽하게 서 있어 한낮에도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숲으로 들어서자 빛과 소리가 달라진다

오대산 월정사로 향한다. 일주문에 걸린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 현판 아래를 지난다. 여기서부터가 월정사 전나무숲길이다. 금강교까지 약 1㎞ 이어지는 흙길 양쪽으로 전나무가 곧게 솟아 있다. 길 한편에서는 상원사 쪽에서 흘러내린 오대천이 나란히 흐른다. 숲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빛이다. 비에 젖은 잎과 가지가 하늘을 덮으면서 바깥의 환한 빛은 부드럽고 낮은 빛으로 바뀐다.

월정사 중심 법당인 적광전. 정면의 석계와 단청, 넓게 뻗은 처마가 오대산 사찰 특유의 장중한 분위기를 전한다.
월정사 중심 법당인 적광전. 정면의 석계와 단청, 넓게 뻗은 처마가 오대산 사찰 특유의 장중한 분위기를 전한다.
전나무는 물을 머금어 더 짙은 갈색을 띤다.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초록은 한 가지 색이 아니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어린잎의 연한 초록과 오래된 잎의 검푸른 빛, 이끼가 덮인 나무 밑동의 눅진한 초록이 여러 겹으로 포개진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공기가 달라진다. 젖은 흙에서는 전나무 냄새가 짙게 올라오고, 계곡에서 내려온 바람은 길 위의 습기와 몸에 남은 열기를 함께 밀어낸다. 도시에서 달고 온 더위는 일주문 밖에 내려놓고 온 듯하다. 이 숲에서는 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별로 없다.

강원도 평창 월정사 중심 법당인 적광전
강원도 평창 월정사 중심 법당인 적광전


길 끝에서 금강교와 월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산사는 문 하나를 통과해 곧바로 닿는 곳이 아니다. 바깥의 소음과 속도를 천천히 덜어내며 숲을 충분히 지나온 뒤에야 만나는 곳처럼 보인다. 전나무숲이 사찰의 긴 진입로인 동시에 마음의 속도를 낮추는 완충지대가 되는 셈이다.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인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이곳에 머문 데서 사찰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오대산은 문수신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고, 월정사는 그 신앙을 이어온 산중 사찰이 됐다.

경내 한가운데에는 국보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이 서 있다. 비에 젖은 화강암 탑은 마른 날보다 한층 짙고 묵직해 보인다. 처마 끝에서 떨어진 빗물은 탑 주변 돌바닥에 작은 원을 잇달아 그린다. 맞은편의 석조보살좌상은 두 손을 모은 채 탑을 바라보고 있다. 탑과 보살상 사이에 내리는 비가 천 년 가까운 시간을 조용히 이어주는 듯하다.

강원 평창 월정사성보박물관 전경. 월정사와 오대산 일대 사찰에서 전해온 불상과 불화, 전적 등 불교문화유산을 보존·전시한다.
강원 평창 월정사성보박물관 전경. 월정사와 오대산 일대 사찰에서 전해온 불상과 불화, 전적 등 불교문화유산을 보존·전시한다.
오대산과 조선의 시간을 만난다

오대산은 오래전부터 사람뿐 아니라 기억을 품어온 산이다. 조선은 전쟁과 화재로 실록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같은 기록을 여러 벌 만들어 전국의 사고(史庫)에 나눠 보관했다. 산이 깊고 접근이 쉽지 않은 오대산에도 사고를 두고, 월정사와 인근 사찰에 관리를 맡겼다.

당시 불편함이었던 산의 깊이가 기록을 지키는 데는 오히려 장점이 됐던 것. 사람의 왕래가 적고 바깥의 소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나라의 기억을 오래 보존하기에 유리했다. 오대산의 깊은 숲은 자연의 경계인 동시에 기록을 지키는 울타리였던 셈이다.

왕실 의례의 절차와 행렬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 의식에 참여한 인물과 가마의 배치까지 세밀하게 담았다.
왕실 의례의 절차와 행렬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 의식에 참여한 인물과 가마의 배치까지 세밀하게 담았다.
월정사 입구의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서는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의궤를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된 실록과 의궤는 여러 차례에 걸쳐 국내로 돌아왔다. 서울에 보관하던 원본도 반출된 지 110년 만에 본래 소장처인 오대산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유리 진열장 안의 실록에는 붉고 검은 글씨로 문장을 고친 흔적이 남아 있다. 왕의 말과 조정의 논의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글자 하나까지 거듭 살핀 자국이다. 권력자의 말조차 기록 앞에서는 함부로 지우거나 고칠 수 없었다. 실록은 왕조의 역사인 동시에 권력을 기억하고 감시한 기록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실록각에 걸었던 현판. 1897년 제작된 것으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실록각에 걸었던 현판. 1897년 제작된 것으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의궤에는 왕실 행사의 절차와 물품 배치, 참여자의 역할이 글과 그림으로 담겨 있다. 행사의 가장 화려한 순간뿐 아니라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누가 무엇을 준비했고, 어느 위치에 놓았는지까지 세세히 기록한다. 역사는 큰 사건만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사람들의 수고와 사소해 보이는 절차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맞은편 월정사성보박물관에는 월정사와 상원사를 비롯한 강원 남부 사찰의 불교문화유산이 모여 있다. 빛바랜 불화와 오래된 전적, 불상과 공예품을 따라가면 오대산 문수신앙과 두 사찰의 역사가 이어진다.

오래된 불화의 색은 화려하기보다 깊다. 시간에 씻긴 붉은색과 푸른색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 화면 안에 조용히 남아 있다. 산중 사찰이 지켜온 신앙도 이와 비슷했을 터. 크게 드러내기보다 세대를 건너 조용히 이어진 믿음이다. 박물관 안에서는 그렇게 오래된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발왕산 올림픽계단 끝에 선 여행객 위로, 눈부신 구름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발왕산 올림픽계단 끝에 선 여행객 위로, 눈부신 구름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구름 가까이 오르자 여름이 멀어진다

오대산을 빠져나와 발왕산으로 향한다. 평창의 여름을 식히는 방식이 숲과 계곡에서 높이로 바뀌는 길이다. 모나용평 드래곤프라자에서 출발하는 관광케이블카는 편도 3.7㎞를 약 18분 동안 올라 정상 가까이에 닿는다.

케이블카가 출발하자 산 아래의 건물과 슬로프가 빠르게 멀어진다. 녹색으로 덮인 여름의 스키 슬로프가 발아래로 내려앉고, 창밖은 곧 짙은 숲으로 채워진다. 계절은 같은 장소의 표정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허리에 걸린 구름이 가까워진다. 맑은 날이면 백두대간 능선이 한 겹씩 펼쳐질 자리지만 창밖의 풍경은 이내 흰빛 속으로 잠긴다. 케이블카가 구름 안으로 들어가자 가까이 있던 나무도 보였다가 사라진다. 바람이 운무를 밀어낼 때마다 검푸른 숲이 잠깐 모습을 드러낸다.

강원도 평창의 발왕산 케이블카
강원도 평창의 발왕산 케이블카
오랜 시간 눈과 바람을 견뎌온 발왕산 정상부 천년주목숲길의 주목과 고사목이 빗속에서 기묘한 자태를 뽐낸다.
오랜 시간 눈과 바람을 견뎌온 발왕산 정상부 천년주목숲길의 주목과 고사목이 빗속에서 기묘한 자태를 뽐낸다.
정상부 승강장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찬 공기가 먼저 밀려든다. 반소매 차림으로 서 있기에는 제법 서늘하다. 산 아래에서 몸에 밴 여름의 기운이 순식간에 걷힌다. 고도는 피부에 닿는 계절마저 바꾼다.

해설사를 따라 천년주목숲길로 들어선다. 운무 사이로 주목과 고사목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오랜 시간 바람과 눈을 견딘 나무들은 하나같이 반듯하지 않다. 몸통은 뒤틀리고 굵은 가지는 땅을 향해 낮게 뻗어 있다. 주목은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간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오래 산다는 것은 온전한 모습으로 시간을 견디는 일이 아니다. 부러지고 비틀리면서도 뿌리를 놓지 않는 일에 가깝다. 뒤틀린 몸통과 부러진 가지가 오히려 이 나무가 지나온 시간을 보여준다.

몇 걸음 앞까지 보이던 숲은 구름이 밀려오면 금세 흐려진다. 방금 지나온 길도 뒤돌아보면 희미하다. 가까운 것과 먼 것,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의 경계가 잠시 사라진다. 시야가 좁아질수록 발걸음은 오히려 느려진다. 보이지 않으니 더 자세히 살피게 된다.

발왕산 정상부의 날씨는 산 아래와 크게 다를 때가 많다. 한여름에도 얇은 겉옷이 필요할 정도. 여기에 강풍이나 낙뢰가 발생하면 케이블카 운행이 중단될 수 있어 출발 전에 정상부 기상과 운행 여부를 꼭 확인해야 한다.

강원도 평창의 발왕산 케이블카타고 해발 1458m 발왕산 정상부. 이끼 낀 바위 사이로 시원한 물줄기가 솟아나는 발왕수 약수터가 자리하고 있다.
강원도 평창의 발왕산 케이블카타고 해발 1458m 발왕산 정상부. 이끼 낀 바위 사이로 시원한 물줄기가 솟아나는 발왕수 약수터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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