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현재를, 현재가 과거를 구하는 양악의 향악화[문화대상 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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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영 기자I 2025.08.26 06:00:08

심사위원 리뷰
전주세계소리축제 '전주의 아침'
박소현의 '김일구류 바이올린 산조'
자연소프로젝트의 '영산회상 전바탕'
韓 음악이 미래로 나아가는 길 제시

[이소영 음악평론가] 유서 깊은 전주 한옥마을 인재고택 학인당에서 열린 전주세계소리축제(8월 13~17일) ‘전주의 아침’은 한국 음악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지난 15일에는 박소현의 ‘김일구류 바이올린 산조’가, 16일에는 자연소프로젝트의 ‘영산회상’ 전 바탕이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랐다.

‘김일구류의 바이올린 산조’ 공연의 한 장면.(사진=전주세계소리축제)
박소현은 미국에서 활동해온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나운영의 외손녀이다. 외조부의 작품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 연구를 계기로 한국음악의 정체성을 자각했고, 김일구 명인에게 수년간 아쟁 산조를 사사하며 마침내 전주 무대에서 바이올린 산조를 선보이게 됐다.

이는 양악의 향악화로 주목받는 시도로서 원래 향악화란 ‘당악의 향악화’에서 유래된 말이다. 당악의 향악화란 당나라에서 수입된 악기 구성, 곡의 양식, 연주 방식, 음악적 언어 등이 모두 점차 우리나라 고유 특성에 맞게 향악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박소현의 바이올린 산조 연주에서 이러한 향악화 현상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의 연주 방식은 보잉과 비브라토 등에 있어서 클래식 바이올린 주법을 버리고 아쟁의 활대질과 농현, 시김새를 적용하기 위한 주법으로 변용됐다. 그 결과 농현과 퇴성, 꺾는청 등 시김새 구사와 장단 놀음이 전통악기 못지않게 자연스럽게 구현됨으로써 김일구류의 아쟁산조에서 바이올린 산조로의 완벽한 전이를 이뤘다.

‘자연소 프로젝트’ 공연의 한 장면.(사진=전주세계소리축제)
다음 날 자연소프로젝트 무대는 또 다른 전환을 보여줬다. 김인규의 작·편곡으로 바이올린, 첼로, 더블베이스, 플루트, 클라리넷 등 8중주가 장구 반주와 어우러져 ‘영산회상’ 전 바탕을 완주한 것이다.

작곡가는 영산회상을 양악기로 직역하는 단계에서 비롯해, 해석적 개입이 본격화되는 작곡의 층위에 이르기까지 다층적 고민을 담아냈다. 또한 현악 주자들이 바로크 활을 사용하거나 첼로와 더블베이스에서 대나무 술대를 활용해 거문고 음색을 재현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향악화에 천착했다.

이는 단순 복원이 아니라 한국 정악의 집체적 호흡을 서양악기로 재해석한 창의적 시도였다. 이런 작업의 뿌리는 1980~90년대 민족음악운동,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운영과 김순남의 음악사상에 닿아 있다. 21세기 들어 소멸된 줄 알았던 그 씨앗이 뜻밖의 시공간에서 새롭게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두 공연은 표면적으로 상이하다. 박소현의 산조는 개인 음악 언어의 집대성인 산조라는 장르가 양악기로 확장된 개별 실험이고, 자연소프로젝트의 ‘영산회상/은 수백 년 누적된 조곡을 오늘의 앙상블로 재현한 공동 실천이다. 그러나 두 시도의 궁극은 같다. 당악의 향악화라는 역사적 변용을 21세기 한국음악이 반복·승화시킨 것이다. 특히 이는 단순한 퓨전이 아니라 전통 장르를 서양악기의 언어로 정밀하게 번역했다는 점에서 탈식민주의 문화실천으로 평가할 만하다.

결국 나운영이 남긴 “선 토착화, 후 현대화”의 신념은 외손녀 박소현과 심정은, 김인규 같은 젊은 음악가들의 무대에서 실증됐다. 과거가 현재를 살리고, 현재가 다시 과거를 구하는 문화적 원무(圓舞)가 실현된 것이다. 두 공연은 한국음악이 미래로 나아가는 길의 한 단면을 제시했기에, 일회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반복·지속·확산하기를 기대한다.

이소영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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