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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에 들어간 굴욕의 시절이었다. 부족한 외화를 모으기 위해 국민이 장롱 속 금붙이까지 내놓던 때였다.
그 무렵 국민을 술렁이게 한 뉴스가 나왔다.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 한글과컴퓨터(현 한컴)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투자를 받는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더 큰 파장은 뒤이어 알려진 투자 조건에서 일었다.
“아래아한글 개발을 포기한다고?”
한글과컴퓨터와 한국MS는 1998년 6월 15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MS가 1000만~2000만 달러를 투자하는 대신 한컴은 아래아한글을 비롯한 워드프로세서 관련 개발과 사업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은행과 기업이 줄줄이 쓰러지던 때였지만 아래아한글만큼은 외국 기업에 호락호락 내줘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정서가 형성됐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는 말처럼 한글을 구현하는 국산 소프트웨어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이자 자부심이었다.
여론이 들끓자 한글과컴퓨터는 방향을 바꿨다. PC통신 이용자들을 중심으로 아래아한글 살리기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벤처기업협회는 ‘아래아한글지키기운동본부’를 결성했다. 1인당 1만원 내기와 국민주 운동이 추진됐으며, 한글과컴퓨터는 1만원에 정품 사용권을 제공하는 ‘한글 815 특별판’을 내놓았다.
운동본부가 한글과컴퓨터 인수 방안을 제시하면서 MS와의 투자 협상은 결국 중단됐다. 그렇게 한국은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을 석권한 MS가 워드프로세서 시장만큼은 압도하지 못한 드문 시장으로 남았다.
위기를 넘긴 아래아한글은 다시 기반을 다졌다.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널리 쓰이는 워드프로세서로 자리 잡았다. 기업용 오피스 시장에서는 엑셀과 파워포인트로 무장한 MS오피스에 밀렸지만, 아래아한글은 한국어 문서 작성에 강점을 지닌 워드프로세서로 명맥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이찬진도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다. 1998년 전문경영인 전하진이 대표이사를 맡았고, 이찬진은 기술담당사장(CTO)으로 자리를 옮겼다. 회사의 정상화와 새로운 경영진의 안착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이미 한글과컴퓨터 안에서 인터넷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었다. 한컴은 1990년대 중반 한글 검색 서비스 ‘심마니’를 선보였고, 1997년에는 포털을 표방한 ‘네띠앙’ 서비스를 출범시켰다.
당시 미국에서는 넷스케이프와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웹브라우저 시장에서 경쟁했고, 야후와 알타비스타를 비롯한 검색·포털 서비스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PC용 소프트웨어를 넘어 인터넷 서비스의 시대가 열리는 장면을 이찬진도 목격한 것이다. 이찬진의 다음 도전은 인터넷 포털 드림위즈로 이어졌다.
‘한글 1.0’의 탄생
이찬진의 도전은 1980년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재학 시절 컴퓨터 동아리인 ‘컴퓨터연구회’에서 활동한 경험이 컸다. 그는 김형집·우원식(정치인 아님) 등과 함께 한글 워드프로세서 개발에 첫발을 내디뎠다. 훗날 ‘리니지의 아버지’로 불린 김택진도 초기 한글 개발 과정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만든 한글 1.0은 출시 직후 빠르게 시장을 장악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출시 1년 만에 국내 워드프로세서 사용자의 70% 이상이 한글을 사용했다.
성공의 배경에는 뛰어난 한글 표현 능력이 있었다. 당시 여러 워드프로세서가 채택했던 KS 완성형은 2350자의 한글 음절만 지원했다. 반면 한글 1.0은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는 조합형 방식을 채택해 현대 한글 음절 1만1172자를 표현할 수 있었다. 한글 창제 원리에 따라 자음과 모음을 조합했기 때문에 ‘똠’처럼 기존 완성형 체계에 없던 글자도 입력할 수 있었다.
훗날 아래아한글로 불리게 된 한글 1.0이 세상에 나온 때는 1989년 봄이었다. 당시 이찬진은 만 23세였다. ‘한국의 빌 게이츠’라는 별명이나 배우 김희애의 남편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전이었다.
플로피 디스크에 담긴 한글 1.0은 용산전자상가의 소프트웨어 유통업체 러브리컴퓨터를 통해 판매됐다. 제품 판매로 마련한 수익금은 한글과컴퓨터를 설립하는 종잣돈이 됐다. 한글과컴퓨터는 1990년 10월 정식으로 출범했다. 개발자 이찬진이 사업가로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한글의 원리를 충실하게 구현했다는 입소문을 타고 아래아한글은 빠르게 보급됐다. 정품뿐 아니라 불법 복제본까지 널리 퍼졌다. 보급 확대에는 도움이 됐지만, 불법 복제는 훗날 한글과컴퓨터의 수익 기반을 흔드는 부메랑이 됐다.
1994년 출시된 한글 2.5는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 타임캡슐에 수장됐다. 당시 서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용 소프트웨어 가운데 하나로 선정된 것이다.
당시는 국내 PC·소프트웨어 산업이 막 성장하던 시기였다. 아래아한글 외에도 MS의 ‘한글워드’, 삼성전자의 ‘훈민정음’, 포스데이타의 ‘일사천리’, 휴먼컴퓨터의 ‘글사랑’, 큐닉스의 ‘글마당’, 한메소프트의 ‘파피루스’ 등 여러 워드프로세서가 경쟁했다. PC가 타자기를 대체하며 사무와 가정으로 빠르게 보급되던 흐름을 타고 문서 작성 소프트웨어 시장도 함께 커졌다.
낭만의 시대였던 1990년대
아래아한글은 뛰어난 한국어 처리 능력과 편리한 사용성을 앞세워 경쟁 제품들을 제쳤다. 1994년 국내 워드프로세서 시장에서 70%가 넘는 점유율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1996년 9월 24일 코스닥 시장에 등록했다. 같은 해부터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오피스 제품 공급 계약도 시작했다. 이찬진은 한국 벤처산업을 대표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떠올랐고,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빌 게이츠’라고 불렀다.
1996년에는 톱스타 배우 김희애와의 결혼으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성공한 벤처 사업가와 톱스타의 만남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화제의 결혼으로 불릴 만했다.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를 맞기 전 고도성장의 낙관론을 누리던 때였다.
잠재성장률이 1%대 후반으로 떨어지고 청년 고용 부진이 장기화한 2026년의 시선으로 돌아보면, 그 시절은 ‘낭만의 시대’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도성장의 이면에서는 기업의 차입 의존과 금융 부문의 취약성이 쌓이고 있었다.
그 무렵 이찬진의 이력에는 정치인이라는 새로운 직함도 추가됐다. 그는 19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 전국구 후보로 영입됐지만 곧바로 국회에 입성하지는 못했다. 1997년 11월 이회창 의원의 사퇴로 제15대 국회의원직을 승계했고, 1998년 5월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아래아한글도 화려한 시기를 구가했다. 1997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한국의 역대 최고히트상품’에서 아래아한글이 2위에 이름을 올렸다. 1위가 서태지와아이들 음반이었고 공동 2위가 박카스였다. 외국의 SW에 대항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국산 SW라는 평가를 받았다.
화려한 성공 뒤에는 위기도 다가오고 있었다. 무리한 사업 다각화와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 기업 시장 공략 실패로 한글과컴퓨터의 경영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에 외환위기까지 덮치면서 회사는 심각한 자금난에 빠졌다. 직원 수를 대폭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한때 1차 부도까지 맞았다.
결국 한글과컴퓨터는 아래아한글 개발 포기를 조건으로 MS의 투자를 받는 방안을 선택했다. 그러나 국민적 반발과 아래아한글 살리기 운동, 한글 815 특별판 판매, 새로운 경영진의 영입에 힘입어 위기를 넘겼다.
1999년 5월 28일 이찬진은 한글과컴퓨터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보유 주식도 모두 매각하며 창업한 회사와 완전히 결별했다. 한글과컴퓨터는 퇴임 후에도 이찬진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그가 새로 설립할 회사에 약 5억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모두가 그의 새로운 출발을 지켜봤다. 한글 워드프로세서로 한국 소프트웨어의 한 시대를 열었던 이찬진은 이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무대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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