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박동석기자] 연금 전쟁이 또 터졌다.
이번엔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 올린 ‘국민연금의 비밀’이란 글이 도화선이다. 이 글에는 국민연금에 대한 불만 8가지가 사례별로 조목조목 적혀있다. 파괴력은 엄청나다. 국민연금 납부 반대 움직임이 일더니 아예 연금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진다.
지난 주말에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는 이번주에도 열릴 것이라고 한다. 한국납세자연맹도 대규모의 전국적 촛불집회를 준비중이다. 네티즌들의 노기(怒氣)가 예사롭지 않다. 서둘러 진화에 나선 정부와 네티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다. 총성만 들리지 않을 뿐 전쟁이나 다름없다.
국민간-세대간 전쟁으로까지 비유되는 연금제도의 맹점은 무엇인지,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 지, 사흘간 총 9편의 기획시리즈로 짚어본다. 연금문제 해결을 위한 전제조건은 결국 사회적 합의 도출이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근원적 이유를 진단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국민연금을 내지 못하겠다’는 네티즌과 ‘국민인 이상 의무적으로 내야 한다’는 정부가 정면 대치중이다. 왜 이런 일이 터졌을까.
이 사태는 사회보장의 최후 보루가 되어야 할 국민연금이 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기는 커녕 타도의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결코 쉽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 한 이 같은 갈등과 충돌은 주기적으로 계속될 것이란 점에서 더욱더 그렇다.
연금 수술을 늦추다 된서리를 맞고 있는 선진국은 그 좋은 본보기다. 이 싸움에서 어느 측이 승리할 지는 아직 장담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안티즌(국민연금에 반대하는 네티즌)과 정부의 현명한 대처를 주문하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정부의 땜질대응은 금물이다. 국가와 개인의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측면에서 보다 신중하고 깊이있는 해결책 모색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 국민연금 무엇이 문제인가
‘서민잡는 강도정책’ ‘복지정책 기만말아..듣기만해도 열받는다’ ‘IMF때보다 더 어려운 시기에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국민연금 아예 폐지하는 게 어떨까요’ ‘국민들에게 돈 뜯어낼 궁리만 하는 것 같군요’ ‘국민의 피를 빨아먹는 정치관료가 되시다니…’
요 며칠 새 청와대 게시판은 국민연금과 노무현 대통령, 정부 관료를 성토하는 글로 가득찼다. 안티즌들의 사이버 시위다.
장기사회보장제도인 국민연금은 또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이 정도면 ‘국민연금은 국민들의 노후와 사회복지를 위해 꼭 필요한 제도이자 가장 안전한 노(老)테크’라는 정부의 말은 씨도 안먹힐 지경이다.
국민연금은 되레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 서민들의 피를 빨아가는 흡혈귀 신세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를 개선할 필요도 없고 아예 없애자는 감정 섞인 구호도 많이 등장한다.
◇ 진실 혹은 거짓
연금전문가들은 최근 안티즌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일부는 타당하지만 국민연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주장도 많다고 진단하고 있다.
안티즌들은 한 사람이 두개의 연금을 받지 못하게 하는 조항, 이른바 ‘병급 조정’의 불합리성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현행 제도 아래서는 부부가 각각 국민연금에 가입해 정년 퇴직후 연금을 받다가 한 사람이 사망하면 배우자는 자신의 연금과 남편 또는 아내의 연금 중 한 개만 받아야 한다.
이들은 돈을 벌 때는 둘이 꼬박꼬박 세금내듯 연금보험료를 냈는데 왜 나머지 하나를 포기해야 하느냐고 분노한다. 불합리하다는 주장이다.
또 60~64세에 연간 500만원이상의 소득이 있으면 연금을 일정부분(10~50%)깎는 재직자 노령연금과 산재보험에서 유족급여를 받을 경우 유족연금을 반으로 깎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항변이다.
윤석명 국민연금연구센터 연구위원은 “네티즌이 제기한 8가지 비밀 중 병급 조정 하나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라고 평가했다. 국민연금은 사회보장제도인데 이를 ‘일반 저축’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제기된 불만들이라는 지적이다.
보건복지부도 네티즌들의 불만이 들끓자 “국민연금은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혜택에 돌아가지 않도록 하고 있다”며 방어에 나서고 있다. 정부는 네티즌을 향해 국민연금이 갖고 있는 소득재분배의 순기능을 되풀이해 강조하고 싶을 터다.
◇ 안티즌들이 분노한 까닭은
최근 안티즌들이 제기한 문제들은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에 대한 반감이 들불처럼 퍼진 이유는 정부가 추진중인 연금개혁과 직접 맞닿아 있다.
윤 연구위원은 “지난해 입법예고된 국민연금 개혁안이 국회에 제출될 시점이 다가오자 이에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그동안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정부가 지난해 입법예고 하고 최근 국무회의 의결을 거친 연금개혁안은 현재 수입의 9%인 연금보험료율을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15.9%로 대폭 올리는 반면 노후에 받는 연금(급여)은 현재의 60%에서 50%로 깎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태백’이다 ‘사오정’이다 해서 가뜩이나 미래가 불안한 판에 정부가 노후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광고해 온 국민연금을 더 내라하고 덜 주겠다고 하니 분노가 폭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더구나 오랜 경기침체로 다달이 연금을 내기도 벅찬 가정도 늘고 있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연금은 곧 고갈돼 나중에 가면 한 푼도 받지 못할 것이란 소문도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 국민연금의 원초적 문제들
연금 개혁은 모두에게 ‘더 낳은 미래’를 위해 하는 것임에도 불만만 커져가는 것은 결과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탓이 가장 큰 것으로 지목된다.
여기에 비하면 안티즌들이 제기한 문제들은 극히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국민연금이 기본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를 크게 세가지로 지목한다.
첫번째는 국민들의 불신이다. 네티즌들의 말대로 국민들의 대다수는 국민연금이 자신의 노후소득보장을 해줄 것으로 믿지 못하고 있다. 또 연금기금이 엉뚱한 곳에서 잘못 운용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신의 뿌리는 깊다. 아무리 정부가 ‘아니다’라고 외쳐도 목청만 아플 다름이다. 국민연금에 관한 한 정부와 국민간에 신뢰는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다음은 공적연금제도 간의 형평성 문제다. 공무원, 사학, 군인연금 등 이른바 특수직역(職役) 연금 가입자들은 국민연금에 가입한 일반 국민들에 비해 2배 정도 높은 연금을 탈 수 있다. 그렇게 제도가 운용된 결과 군인연금은 1977년에, 공무원 연금은 2001년에 사실상 적립기금이 바닥이 났다.
그 적자는 전액 국민세금으로 보전해주고 있다. 그러다보니 일반 국민들만 봉이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잘못된 공적연금 정책 방향이다. 정부는 지금껏 국민연금이 민영보험보다 몇 배 더 유리한 투자수단임을 ‘노(老)테크’라는 신종용어까지 만들어가면서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이제와서는 연금급여를 깎겠다고 한다. 정부의 말대로 국민연금을 저축으로 알고 있는 국민들이 납득할 리 만무하다. 마치 정부에 사기를 당한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이래저래 불신과 배신감만 잔뜩 쌓여온 게 저간의 사정이다.
그외에 정부의 과욕이 부른 화근도 적지 않다. 국민연금의 역사는 올해로 15년밖에 안된다. 그 짧은 시간에 내실을 키우 지 못한 채 외형만 급속히 커져 버렸다. 말하자면 정상 운행속도를 지키지 못하고 과속을 한 셈이다. 가입대상자가 전국민으로 확대돼 가입자가 1600만명을 넘어섰고 규모도 100조를 넘은 지 오래다.
급하게 서두르다보니 그동안 쌓은 제도는 모래성에 불과했다. 안티즌들의 무차별 공격을 산 것도 군데군데 뚫린 구멍을 제 때에 수리하지 못한 탓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