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에 버금가는 능력을 확보한 상황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협상의 입구로 고집하면 아무런 진전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렸다. 이 대통령은 앞서 뉴욕타임스(NYT)와 AP통신 인터뷰에서도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을 출발점으로 삼아 감축과 폐기로 이어가야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번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이를 정부의 대북정책 노선으로 국제사회에 공식화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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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81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무엇보다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한반도의 오래된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멈춰 있던 북미대화가 조속히 재개되고, 한반도 전쟁 종식과 평화체제 전환을 위한 당사자 간 대화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이 제시한 해법의 핵심은 비핵화에 이르는 순서를 바꾼 데 있다. 그는 “우선 북측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중단시키고, 중기적으로 축소를 거쳐 장기적으로 핵 없는 한반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는 유지하되 북한이 핵무기를 모두 폐기해야 대화와 보상이 가능하다는 접근에서 벗어나, 추가적인 핵 능력 확대를 먼저 멈추고 단계적으로 감축을 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북핵 협상을 비핵화에만 한정하지 않고 전쟁 종식과 북미 관계 정상화, 평화체제 구축, 동북아 다자협력과 함께 추진하겠다는 의미도 담겼다.
이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공존의 방향으로 세 가지 청사진을 제시했다. 남북이 상호 체제를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동 성장을 모색하는 ‘포용적 평화공존’, 소통 채널을 복원해 위기와 갈등을 통제하는 ‘안정적 평화공존’, 핵과 전쟁 없는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책임 있는 평화공존’이다.
이 대통령은 “국제무대에서도 북측을 존중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해 나가겠다”며 보건·재난·기후 위기 등에서 협력의 길을 열겠다는 뜻도 밝혔다. 당장의 통일이나 일괄적인 비핵화보다 충돌 방지와 평화공존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먼저 복원하겠다는 접근으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은 남북한이 35년 전 유엔에 동시 가입한 사실도 상기했다. 당시 동시 가입이 분단 이후 이어진 경쟁과 대결에서 벗어나 평화공존의 기틀을 마련한 계기였다고 평가하며, 유엔과 안전보장이사회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 다시 책임 있고 건설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유엔 연설에 앞서 공개된 NYT 인터뷰에서는 단계적 접근에 필요한 구체적인 교환 조건도 제시했다. 이 대통령은 “어차피 특별히 효과적이지 않은 제재와 추가 핵무기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 개발 중단을 맞바꾸는 것은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제재를 일부 완화하는 대가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먼저 동결한 뒤 상호 인센티브와 양보로 신뢰를 쌓고, 핵무기 감축과 폐기로 진전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이 대통령은 “현재 상황에서 비핵화를 목표로 삼는 것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라며 기존 접근의 한계도 지적했다.
이 같은 구상에는 북한의 핵 능력이 협상으로 되돌리기 어려운 수준까지 커지기 전에 추가 고도화부터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이 매년 10∼20개의 핵무기를 추가로 생산할 능력을 갖췄거나 이미 생산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정부 추정도 소개했다. 북한이 충분한 핵무기와 미사일을 확보했다고 판단하면 이를 수출하려 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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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적 비핵화 구상의 또 다른 축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이 대통령은 유엔 연설에서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으로 변화의 가능성이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NYT 인터뷰에서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협상장으로 다시 이끌 수 있는 지도자는 트럼프 대통령뿐이라는 인식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의 개인적 관계를 활용해 북미대화를 재개하면 한국이 이를 비핵화와 종전, 평화체제 구축으로 연결하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겠다는 전략이다. 이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이자 페이스메이커로서 대화의 길을 열고 또 이어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관건은 북한의 호응과 한미 간 정책 조율이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한국을 대화 상대에서 배제하고 있다. 러시아·중국과의 관계 강화로 김 위원장이 과거보다 유리한 조건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이날 이 대통령 연설 도중에 북한 외교관들은 자리에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핵동결의 범위와 검증 방식, 북한의 조치에 상응해 완화할 제재의 종류와 시점도 구체화해야 한다. 핵동결이 비핵화로 가는 중간 단계가 아니라 북한의 핵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는 종착점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해소하는 것도 과제다.
이 대통령은 협상 여건이 과거보다 나빠졌더라도 외교 외에는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대화를 다시 열고 북한이 추가 핵 개발 중단에 호응해야 ‘고도화 중단→축소→핵 없는 한반도’ 구상도 움직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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