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 종로구 부암동 고갯길에는 1970년대에 지어진 수도가압장이 있다. 흔히 ‘공공 물탱크’라 불리는 네모 반듯한 콘크리트 박스 건물이다. 상수도망이 각 가정에 닿지 않던 시절 마을단위로 수돗물을 저장해 두던 곳인데 수도사업이 확대되면서 무용해지자 방치돼 있었다. 물을 담아두기만 했던 그리 크지 않은 콘크리트 구조물은 건축가의 손을 거쳐 그 공간의 감성에 꼭 맞는 사람을 기리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수도 가압장은 물을 가둬두는 단순한 목적에 맞게 진입공간 및 물탱크 2개가 전부다. 건축가는 그 중 2개의 물탱크를 하나는 열고 하나는 닫아 두 개의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전시물’이 있는 유적관과 미술관이 아닌 ‘시인’을 위한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가. 건축가는 최소한의 변형을 통해 두 개의 콘크리트 박스를 윤동주의 삶을 은유하는 매개체로 바꿔 냈다.
기념관에는 3개의 전시장이 있는데 진입공간을 1전시장으로 삼아 시 몇 편을 전시했다. 그리고 두 개의 물탱크가 2, 3전시장이 되는데 2전시장은 물탱크의 천장을 완전히 개방했다. 물이 담기던 공간에 빛이 쏟아지고 수십년간의 물때가 낀 공간은 그 무늬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엔 다시 물이 담긴다. 일제 치하의 굴욕적 시간을 일본에서 보낸 윤동주 개인의 역설적인 시간은 어쩌면 지붕이 열린 물탱크를 통해 기록될는지 모른다.
3전시장은 사다리가 달려 있던 ‘점검구’를 열고 나머지는 그대로 뒀다. 아직 물내가 나는 것 같은 음습한 물탱크 위에서 작은 빛줄기가 든다. 뜯어낸 사다리는 접합부만 남아 빛을 향해 올라갈 수 없음을 자각케 한다. 답답하고 절망적인 공간, 하나의 빛과 버릴 수 없는 희망, 뜯겨진 사다리. 윤동주의 시가 쓰여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 공간이 그대로 연출하고 있는건 아닐까.
윤동주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널리 알려진 ‘자화상’이란 시가 수록돼 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 집니다./도로 가 들여다 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하략)’
미워졌다, 그리워졌다, 안쓰러워져 자꾸 돌아보게 되는, 그래도 다시 미워지는 한 사나이. ‘자화상’은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일던 당시를 살아가는 윤동주의 내적 갈등과 많은 결심들이 녹아 있다. 윤동주의 장례식에서도 낭독됐을 만큼 ‘자화상’의 화자는 본인으로 해석되곤 한다.
우물 속에 갇힌 자신을 자꾸만 들여다 보아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간 한 시인의 기념관이 ‘물탱크’에 자리하게 된 건 우연일까. 버려진 물탱크가 윤동주를 품게 된 것은 운명이 아닐까. 윤동주의 시는 시대의 거울이다. 윤동주를 위한 공간이 그 사람을 그리고 그 시대와 오롯이 닮아 있기에 우리가 들여다 볼 수 있는 어떤 기념관보다 담백하지만 강한 울림을 주는 공간이 됐다. 두 개의 물탱크, 윤동주의 우물. 2월이 오면 쌀쌀한 아침 공기를 헤치고 한번쯤 찾아가 볼 만 한 곳이다.
|
- 현(現) Architects H2L 대표
- 현 중앙대학교 건축학부 겸임교수
- 건축사/건축학박사/미국 친환경기술사(LEED 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