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평범한 한 사람이 채권맨으로 변신하는 과정에는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을까. 삼성투신운용의 스트레티지스트인 박성진 차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연의 연속이 필연을 만든다”는 것이 실감난다.
우리 채권시장에서 아직도 낯설은 ‘스트레티지스트(strategist)’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박 차장은 사실 채권에 대한 기본지식이 전혀 없이 채권시장에 뛰어들었다. 대학에서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유학을 준비하다가 ‘의외의 사건’으로 증권사에 입사해서 우연하게 채권부로 발령을 받고 어쩌다가(?) 채권분석가가 됐다. 박 차장은 그러나 97년 이후“채권시황하면 박 아무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장에 이름을 날렸다.
채권시장에서 기술적 분석을 처음으로 시도해 호평을 받았고 이코노미스트와 펀드매니저의 중간자로서 투자전략을 만들어내는 ‘스트레티지스트’라는 새로운 직종을 사실상 개척했다. 박 차장은 당시 누구도 정통 스트레티지스트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재치’와 ‘글재주’로 이름을 얻었지만 지금은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는 “훈련생”이다.
박 차장 스스로 “시황 제목을 그럴듯하게 뽑는다고 해서 채권시장참가자들이 그것을 참고로 돈을 벌 수는 없다”고 말한다. 진짜 스트레티지스트는 그야말로 돈되는 전략을 짜는 사람이다. 그런 뜻에서 박 차장은 100% 완성된 전략가는 아니다. 본격적으로 ‘스트레티지스트’로 변신하고 있는 젊은 채권맨일 뿐이다.
박 차장은 채권을 처음부터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대학원에서 익힌 통계처리 기법과 컴퓨터 사용 능력으로 정말 우연하게 기술적 분석을 하게 됐지만 진짜 채권의 매력은 나중에 알게 됐다는 것.
박 차장은 “채권의 진짜 재미는 ‘쫀쫀함’에 있다”고 말한다. 채권투자의 핵심은 주식과 같은 ‘대박’이 아니라 차근차근 무엇인가를 쌓아가는 것이고 꼼지락 꼼지락해서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정말 신뢰받는 스트레티지스트로 인정받는 것이 실현되면 학창시절 이루지 못했던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싶다는 박 차장의 “환골탈태” 과정을 자세하게 들어봤다.(인터뷰 기사 하편의 약력 참조)
<깨지고 비판받는 것이 직업인 사람>
-채권 스트레티지스트도 운용을 합니까. 박 차장도 펀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운용은 안 합니다. 가상 펀드를 운용하면서 트레이딩에 관여하는 겁니다. 공동운용펀드에 가끔 가담하는 일이 있어요. 제가 리커멘드를 했을 때 그 뷰를 택하는 매니저가 있으면 제 생각이 반영되는 거죠. 그러니까 포트폴리오를 직접적으로 매니징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럼 연봉협상시 성과측정은 어떻게 합니까. 펀드매니저의 경우 운용실적이라는 확실한 지표물이 있지만 스트레티지스트의 경우는 좀 애매한 것 같은데.
▲그건 전적으로 저희 보스 마음입니다.(웃음) 저희는 실제로 MP(model portfolio)를 운용해요. MP가 결정되면 그 안에서 20% 정도 자신의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어요. 가령 이번주 저희의 듀레이션이 1로 결정되면 강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갈 수 있는 최대한도가 1.2고 “안 좋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0.8까지 갈 수 있는 거에요.
드물지만 만약 “난 도저히 동의 못하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운용본부장에게 가서 특별 허락을 받습니다. 그럼 50%까지 움직일 수 있으니까 스윙 폭이 더 커지죠. 제 기억으로는 그런 일은 한 번 정도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자신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아침 회의에서 그 주장을 관철시키면 되니까요. 저희는 아침마다 여는 회의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운용실적, 모닝미팅 등 팀플레이에 얼마나 충실한가, 마지막으로 고객관리 등력 등으로 평가를 받는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평가를 하니까 운용성과 못지않게 매일매일의 모닝미팅이 정말 중요해요.
-모닝미팅에서 박 차장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MP를 구성하는 건가요.
▲대충 그렇습니다. 미국 금리나 원자재 가격 추이처럼 저희가 매일매일 확인하는 market indicator 가 있어요. 그런 것과 더불어 기술적 분석과 관계된 여타 관계자료, 산업활동 동향 등 중요한 발표가 있었을 경우 그 의미분석 등을 담당하고 있어요.
금융수탁고, 주간수급, 물가동향 등도 신경쓰죠. 그런 후에 제가 생각하는 방향과 전략을 최종적으로 말합니다. MP에 변화가 있을 때에는 “이번엔 좀 늘려보자. 이럴 때 주종목은 몇년물 무슨 채권” 이런 식으로 리커멘드를 해요. 그 후에는 제가 동네북이 되는 시간이 옵니다.(웃음) 매니저들과 우리 보스(김용범 상무)가 잔인하게 씹어대죠. 그러니까 저는 Commentator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MP는 얼마나 자주 교체합니까. 한 달 인가요.
▲보통 1주마다 미세조정을 해요. 매달 초에는 밴드를 정하구요.
-펀드매니저와 달리 가시적인 결과물을 가지고 평가받는 것이 아니어서 평가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면 그때는 항의를 하면 됩니다. “왜 나를 B로 평가했습니까. 작년에 내가 한 일은 이런 근거에서 A 아닙니까” 라고. 그러면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당신은 B다” 라고 반박하겠죠. 그걸 수긍 못하겠으면 떠나는 거에요. 간단해요. 이렇게 말하면 무척 잔인하게 들린다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에 끌려서 공사구분을 못하는 팀이라면 절대 능률이 올라갈 수 없어요.
저희 생각은 그렇습니다. 삼성투신은 파동을 타는 식의 의사결정 구조로는 안됩니다. 포지션 트레이딩을 할 뿐이지 scalper(초단기매매 투자자)가 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인 능력을 중요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채권에 어울리지 않는 바이올린과 신문방송학>
-전공은 신문방송학을 하셨어요. 채권맨으로서 특이한 경력인데요.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86학번이고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학부 졸업 후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 후 군대에 갔습니다. 그 나이에 일반병으로 갔죠. 하하. 그 때 생각은 “복무를 얼른 마치고 유학을 떠나자” 였습니다. 공부를 계속해서 교수가 되는 것이 그 당시 제가 가진 유일한 꿈이었거든요.
군대에서 영어공부를 계속해서 제대 전에 꽤 높은 토플 점수도 받았습니다. 제대 후에 모든 준비를 끝내고 미 대사관에 비자를 받으러 갔죠. 그랬더니 대사관 직원이 “your financial status is not guarantee to finish your coursework ” 라고 딱 한마디 하더군요. 하늘이 노래졌죠.
-장학금을 받을 생각은 안 했나요.
▲저도 처음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했죠. 어지간히 부잣집 아들이 아닌 다음에야 박사과정 학비나 생활비 전부를 들고 갈 수는 당연히 없으니까요. 가서 조교도 하고 돈도 벌겠다고. 그 당시 한미 관계가 안 좋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1년치 학비를 들고 갔는데도 단칼에 거부하더라구요.
-신방학을 하신 것도 독특합니다만.
▲어린 시절에 당돌한 생각을 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 아버님께서 동아건설을 다니셨어요. 그 당시가 한참 중동붐이 일어났을 시기라 아버님께서 한 2년 여 동안 사우디에 나가셨습니다. 기계수리 쪽 일을 하셨거든요. 학자금 융자가 나왔기 때문에 지금 태평로에 있는 동아건설 사옥을 3달에 한 번씩 다녀왔어요. 서류증명이 중요하니까 학비영수증을 들고 수령자인 제가 직접 동아건설 재무부서에 가서 돈을 받아오는 시스템이죠. 여담이지만 그 돈을 중간에서 가로챈 적이 한번도 없다는 거 아닙니까. 하면 어머니한테 무지하게 혼나니까요. 하하.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돈을 받으러 갈 때마다 재무부서에 계신 분들이 다닥다닥 붙은 조그만 철제 책상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안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 학교에서 죽어라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가면 뭐하나. 나도 대학 졸업 후 취직하면 나중에 저렇게 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유치하고 단순한 접근법이었지만요. 이런 꽉 막힌 공간에서 1년 365일 일하면서 평생을 산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 너무 싫었습니다.
-일찍부터 화이트칼라의 비애를 온 몸으로 느낀 거네요. (웃음)
▲당연하죠. 그래서 음대를 가서 음악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안 믿으시겠지만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바이올린을 했어요. 없는 살림에 어머니를 막 졸라서 초등학교 6학년에 시작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교육에 남다른 열성을 가진 분이라 가능했어요.
저희 세대만 해도 남자가 음악한다면 “에이 무슨~” 이라는 식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음대는 정말 공부못해서 간다는 인식이 강했으니까요. 어쨌든 아버지가 무척 반대를 하시니까 음대진학의 의지와 자신감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공부해서 대학을 가게 됐는데 경영학은 싫더라구요. 아까 말씀드렸죠? 화이트칼라의 비애(웃음). 학력고사를 쳐놓고 갈 수 있는 대학을 이리저리 알아보는 와중에 한양대 신방과에서 영화론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됐어요.
게다가 과목 중에 방송제작실습이라는 것도 있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래 이거다. 난 PD가 될거야” 라는 결심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 문예부에서 나름대로 콩트니 시를 쓴다고 나선 적도 있었고 제가 그 당시 ‘TV문학관’이라는 프로그램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PD가 돼서 그러한 서정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어보리라는 생각에서 입학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구체적인 건 하나도 없어요. 그냥 막연하게 PD가 된답시고 간 것 뿐이에요(웃음). 대학에 갔더니 그거하고는 완전히 다르더군요. 실속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하
-그렇지만 대학원까지 갔잖습니까. 대학시절 얘기 좀 해주세요.
▲연예나 창작계에 입문한다는 것은 학교 커리큘럼과 상관있거나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게 아니었어요. 방송기자재도 노후했고. 사람들은 흔히 신문방송학이라는 학문이 무척 프랙티컬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사회학적인 면이 매우 강합니다. 아니 거의 사회학과 흡사해요.
젊었을 때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죠? 저는 제가 정의할 때 네오 막시스트였습니다. 그냥 소위 입으로만 자기가 굉장히 지성인이고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바로 네오 막시스트죠.(웃음) 제가 바로 그 네오막시스트였어요. 하하
대학 2학년 때 문화사회학 공부를 하면서 자넷 월프라는 미 여성학자를 알게 됐습니다. 네오막시스트 계열의 예술사 전공학자죠. 네오막시즘 하의 예술사는 예술의 허구성을 공격하는 겁니다.“이 고가의 그림과 다른 그림의 차이는 뭐냐? 왜 이게 이렇게 비싼 가격을 받아야 하는가?” 를 연구하는 거죠. 그 안의 가식과 허구를 찾아낸다고 할까요.
문화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제가 가지 못한 음대에서 예술한답시고 설치는 친구들을 비하하고 무척 미워했어요(웃음). 마구잡이로 씹고 적나라하게 비판하는거죠.
어쨌든 공부를 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의 비판이론을 접했는데 이 학문은 현대의 미디어가 어떤 식으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확대재생산하고 지배구조를 고착화시키는지를 연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확대재생산은 정말 잘 쓰는 용어 중 하나였고. 하하. 지금은 이데올로기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돼 버렸지만 그때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한 거에요.
<예상치 않은 통계 기법과 컴퓨터와의 인연>
-대학원에서는 무엇을 했나요.
▲아까 말씀드린 공부를 하려고 대학원에 갔는데 정작 그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 당시 문과학생들에 비해서 컴퓨터를 좀 다루는 편이었어요. 관심도 많았고.
보통 다른 학문에서는 미국식 접근방법이 우세해요. 논리실증주의를 중시하고 이론설정 가설, 증명, 검증으로 이어지는 식의 체계를 갖추고 있고요. 그런데 이 쪽 계통의 학파에서는 뭐든지 계량분석을 해요. 방법론을 많이 도용하고. 사회과학통계를 하는 식 말이죠.
제가 컴퓨터를 다룰 줄 알다보니 통계 쪽으로 접근하기 쉬웠고 서울대학교 언론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 비슷한 식으로 잠깐 일하게 됐습니다. 통계패키지를 돌려서 검증하는 일이랑 분석프로젝트를 무지 많이 했어요. 집에도 거의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한번은 아예 서울대 근처에 방을 하나 얻어서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집에 왔다갔다 하는 시간도 아까우니까 여관에 자리를 잡은 거죠. 신림, 봉천동에 여관은 좀 많습니까. 연구소에서 일 끝나면 데스크탑 컴퓨터를 싸들고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어요. 그 때부터 이 놈의 통계인생이 시작된 거에요. 제 기억으로는 그 때 학교에 벌어준 돈이 수억이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지금하고 있는 일의 바탕이 된 거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많이 쓰지는 않지만 논리적인 분석을 시작한 건 분명 그 일을 통해서였죠. 제가 그 일을 왜 계속했냐면 저더러 통계를 잘하는 것이 강점이 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언론학계는 양분돼서 둘 사이는 같은 한국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지경이었어요. 말이 안 통하는 것이 당연하죠. 문화이론과 알튀세르를 논하는 네오막시즘 계열의 유럽학파와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실용주의자들은 애초부터 얘기가 통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딴에는 그 두 개를 접목시킨 새로운 모형을 만들고 싶었어요. 석사논문도 그런 주제로 썼습니다.
-석사논문 주제는 뭡니까.
▲<사회구성집단의 인식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 똑같은 단어라도 사용하는 계급이 다르면 받아들이는 의미나 이미지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내용이었죠. 그 이해의 차이를 수리적으로 검증해내는 거에요. 거창하죠? 그런데 교수님이 논문을 보고 “도저히 너에게는 학위를 못 주겠다. 이것을 논문이라고 썼냐” 고 하시더군요. 사실 제가 봐도 너무 허술하긴 했어요.(웃음) 교수님께 제발 졸업만 시켜달라고 졸랐습니다. “저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못해서 장교시험도 봐야됩니다. 졸업만 하게 해주세요” 라고 비굴하게 말했죠. 하하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