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뉴욕의 한 연금 세미나장에서 키스 암박츠히어(Keith Ambachtsheer, 세계적 연금학자이자 CEM Benchmarking 창립자로 연금 거버넌스 품질이 수익률을 좌우한다는 실증 이론을 정립한 인물)는 고위 연기금 임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참석자들은 운용사 이름이나 시장 전망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짚은 것은 조직 내부의 문제였습니다. 의사결정 과정이 느리고, 책임이 분명하지 않고, 필요한 자원이 부족하고, 미션이 흐릿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체감한 ‘탁월성의 부족분’은 중간값 기준으로 연 66bp였습니다.
66bp는 작아 보입니다. 0.66%포인트입니다. 하지만 퇴직연금에서 0.66%포인트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10년, 20년, 30년 동안 복리로 쌓이면 가입자의 노후소득을 크게 바꾸는 차이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숫자의 출처입니다. 이것은 특정 펀드매니저의 운이나 한 해의 시장 전망에서 나온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좋은 연금은 좋은 상품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조직과 의사결정 체계에서 나온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숫자였습니다.
이후 암박츠히어와 동료들은 이 직관을 실제 데이터로 검증하려 했습니다. 1998년 발표한 연구는 80개 미국·캐나다 연기금의 1993~1996년 자료를 분석했습니다. 비용과 위험을 조정한 뒤에도 많은 기금이 자신이 선택한 운용 프로그램의 비용과 위험을 정당화할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 부족분은 앞선 66bp 추정과 놀랍도록 가까운 연 60bp 수준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실한 의사결정 체계가 깎아먹는 ‘거버넌스 결함(Governance Deficit)’의 실체였습니다. 연구는 성과를 가르는 요인으로 규모, 패시브 운용 비중, 그리고 조직 설계의 품질을 함께 보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연금 거버넌스는 추상적 미덕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성과 요인으로 다뤄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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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장에서 우리는 네덜란드의 산업별 기금이 어떻게 흩어진 돈을 모아 금융기관을 상대하는 주인이 되었는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금이라는 그릇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연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릇 안에서 누가 목표를 정하고, 누가 권한을 위임하고, 누가 실제로 실행하고, 누가 결과를 평가해 다시 고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바로 이 순환이 거버넌스입니다.
거버넌스는 위원회 이름 하나가 아닙니다. 적립금운용위원회, 투자위원회, 이사회, 성과평가위원회 같은 조직 명칭은 껍데기일 수 있습니다. 핵심은 그 조직들이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하느냐입니다.
첫째, 의사결정 체계입니다. 누구의 이익을 위해 돈을 굴리는지, 목표수익률과 위험 한도는 무엇인지, 장기 운용 원칙은 어떻게 정하는지 결정해야 합니다. 둘째, 조성·관리 체계입니다. 돈이 어디서 들어오고, 어떤 계좌와 기금에 모이며, 비용과 이해상충은 어떻게 관리되는지 봐야 합니다. 셋째, 실행 체계입니다. 실제 자산배분과 운용은 누가 맡고, 그에게 어떤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는지 정해야 합니다. 넷째, 평가와 피드백 체계입니다. 성과와 비용과 위험을 비교 가능한 기준으로 측정하고, 잘못된 결정은 다음 의사결정에 반영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가 끊기면 위원회는 회의록을 만드는 장소가 됩니다. 이 네 가지가 이어지면 위원회는 질문하는 주체가 됩니다.
회사 안의 작은 위원회도 거버넌스가 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거버넌스는 반드시 거대한 독립 기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많은 401(k) 제도에서 회사 내부 투자위원회 또는 그에 준하는 수탁자 의사결정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회사가 직원 돈을 직접 운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회사는 직원에게 제공할 상품 라인업을 정하고, 그 라인업이 합리적인 절차와 근거에 따라 유지되고 있는지 점검합니다.
수천 개 상품을 그대로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장기 운용에 적합한 핵심 상품군을 선별하고, 수수료와 성과와 위험을 주기적으로 살핍니다. 성과가 지속적으로 부진하거나 비용이 과도한 상품은 교체 대상이 됩니다. 회사가 이렇게 깐깐해지는 이유는 선의만이 아닙니다. 펀드 선정과 감시를 소홀히 해 직원들이 질 나쁜 상품에 노출되면 수탁자 책임 위반으로 문제 될 수 있는 법적 환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의 401(k)는 개인에게 선택권을 주면서도, 그 선택지가 놓이는 선반을 회사가 함부로 방치하지 못하게 만든 제도입니다. 이것은 네덜란드식 독립 기금과 다른 형태이지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가입자 편에서 상품을 고르고, 누가 그 선택을 계속 감시하는가.
한국의 현실 — 이름은 있으나 순환이 약하다
한국은 어떤가요? DB형은 위원회가 있어도 전문성 부족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DC형은 상품 라인업을 상시적으로 점검하는 위원회가 제도적으로 뚜렷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DC형 가입자들은 고독합니다. 회사는 금융기관과 계약만 맺어주고 빠집니다. 근로자는 수백 개의 낯선 상품 목록 앞에서 길을 잃습니다.
문제는 위원회가 없다는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사결정, 조성·관리, 실행, 평가·피드백의 순환이 약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목표수익률과 위험 한도가 실제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쓰이는지 불분명합니다. 금융기관이 제시하는 상품과 보고서를 누가 가입자 이익 기준으로 검증하는지도 약합니다. 운용 결과가 나빠졌을 때 그것이 시장의 문제인지, 상품 선별의 문제인지, 비용의 문제인지, 감독의 문제인지 따지는 언어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한국 퇴직연금의 낮은 성과는 단순히 “투자를 못했다”는 말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좋은 의사결정이 반복될 수 있는 구조가 약했고, 나쁜 의사결정이 교정될 수 있는 피드백도 약했습니다. 앞서 말한 수탁자 책임의 부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드러납니다. 누군가 돈을 보관하고 기록하고 상품을 제공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하나의 책임 있는 순환으로 묶는 주체가 약한 것입니다.
남겨진 질문 — 거버넌스는 성과를 만드는가
암박츠히어의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그는 “어떤 상품이 좋은가”가 아니라 “어떤 조직이 좋은 성과를 반복해서 만들어내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CEM Benchmarking과 글로벌 연금 벤치마킹의 흐름은 비용, 성과, 조직 구조, 투명성을 계속 측정합니다. 측정해야 관리할 수 있고, 관리해야 개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암박츠히어가 캐나다 연금 모델을 혼자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캐나다의 연금 개혁은 재정위기, 정치적 결단, 제도 설계, 전문가 조직의 축적이 함께 만든 결과입니다. 그러나 “좋은 연금은 좋은 상품이 아니라 좋은 조직에서 나온다”는 그의 문제의식은 1990년대 캐나다 연금개혁의 지적 토양과 깊이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분명합니다. 거버넌스가 의사결정의 순환이라면, 그 순환 안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엇일까요? 바로 조성과 운용의 분리입니다. 주인은 목표와 원칙을 정하고, 전문가는 그 위임 안에서 운용하며, 다시 주인은 그 결과를 평가해야 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캐나다가 이 원칙을 어떻게 제도화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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