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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그린 영수증[최기훈의 외국기업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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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기자I 2026.10.24 0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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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생활 경험없이 외국계 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국내 기업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뒤 30대 후반에 외국계 기업으로 옮겨 고위 임원까지 지낸 금융인은 흔치 않다. 저자가 들려주는 외국계 기업의 문화와 업무 방식, 그 안에서 부딪히고 배운 생생한 장면들은 외국계 기업 취업과 커리어 전환에 관심 있는 2030 독자들에게 현실적인 길잡이가 될 것이다. [편집자 주]

손으로 그린 영수증[최기훈의 외국기업 생존기]
[최기훈 아자스쿨 이사] 어느 날 한국에서 같이 일하던 미국인이 빈 종이에 볼펜으로 뭔가 열심히 그리고 있길래 뭘 하고 있는지 물었더니 “손님과 점심을 먹으며 종업원에게 팁을 줬는데 그 비용을 회사에 청구하기 위해 영수증을 만들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필자가 “전산으로 출력한 것도 아니고 손으로 만든 영수증은 비용 처리가 좀 곤란하지 않을까”라고 하자 그는 오히려 의아해 하며 “내가 업무적인 자리에서 실제로 돈을 지출한 것이 사실이니 문제가 없고 미국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청구한 적이 많다”고 했다.

함께 근무하던 직원이 미국 대학의 MBA 과정에 지원해 필자가 추천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 학교별로 웹사이트 링크를 받아 질문에 대한 답을 채우는 것이었는데 실수로 몇몇 대학의 내용을 약간 잘못 적어 제출하게 됐다. 사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혹시 입학 심사에 부정적으로 작용할까 싶어 크게 걱정했다. 그런데 마감이 지난 이후에도 GMAT 점수를 수정할 수 있게 해 준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각 대학 입학 담당자에게 내용을 고칠 수 있게 해 달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랬더니 며칠 만에 모든 학교에서 답장이 와서 수정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하다가 우리나라에 와서 교수로 있는 분께 이런 경험을 이야기했더니 “한국은 경쟁이 치열하고 조금이라도 공정성에 어긋나지 않도록 형식적인 부분에 민감한데 미국은 대체로 현장의 자율성과 실질적인 내용을 중요시하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며 본인이 한국에 와서 겪은 이야기를 해 줬다. 대학원 입학 시험에 신분증을 안 가지고 온 지원자가 있어 시험 끝나고 바로 가져와서 확인하도록 허용해 주려고 했으나 다른 교직원이 “특혜를 준 것으로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어 절대 안된다”고 만류했다고 한다.

미국 사회가 허술하다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따라 행동을 통제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규제에서도 미국에서는 대체로 네거티브(Negative) 방식의 비중이 높은 것 같다. ‘해서는 안된다고 명시된 것 빼고는 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해도 된다고 미리 나열된 것만 할 수 있다’는 것은 포지티브(Positive) 방식이다. 네거티브 방식을 방임형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사전에 다 통제하고 감독하는 것이 비용이 많이 소요되고 창의성을 제약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넓은 범위의 자율성을 주지만 사후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 책임을 무척 엄격하게 묻는다. 분식회계가 이슈가 돼 경영진이 중형을 선고받고 세계적인 회계법인이 해체되기도 했다.

회사 내부 비용 규정에 ‘고객과의 식사비는 합리적인(reasonable) 범위 내에서 적절하게(appropriately) 지출해야 하며 이례적인(extraordinary) 장소는 피해야 한다’고 돼 있어 난감했던 기억도 있다. 금액은 얼마까지 가능한지, 장소는 어떤 곳이 되는지 안되는지 딱 정해 주면 좋겠는데 애매하게 표현돼 있었다. 실제 사례들이 쌓이다 보니 승인이 되는 경우와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 있기는 하지만 가끔씩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책임감이다. 스스로 판단해 선택하고 그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나중에 정당하지 못한 행위라는 것이 밝혀지면 회복하기 어려운 큰 대가가 따르기 때문에 조심할 수밖에 없다. 업무적으로 성과가 부족한 것은 어떻게 설명하거나 만회할 수 있지만 고의로 윤리규범(Code of Ethics)이나 행동강령(Conduct)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경우는 예외없이 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 손으로 쓴 영수증도 인정해 주고 이미 제출한 추천서도 수정할 수 있게 해 주지만 만약 사실과 다르거나 부정한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지면 회사나 학교를 떠나야 하고 다른 법적인 책임까지 져야할 수도 있다. 느슨해 보이는 절차를 만났을 때는 스스로 ‘이 건이 이슈가 됐을 때 자신있고 떳떳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고 확인한 후 행동해야 한다. 자율성만큼 개인의 판단 부담과 책임도 커진다.

■최기훈 이사 =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하나은행, 미래에셋증권, 피델리티자산운용,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SC제일은행 등 금융권에서 30여 년을 근무하고 지금은 국내 최대 체험학습 플랫폼 아자스쿨에서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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