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 서거 25주기] ①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기업경영학회 회장)
''기업''이 아닌'' 산업''을 만든 기업가…건설·조선·자동차 초석
도전 DNA 지금도…수소·로봇·자율주행 혁신 개척 중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기업경영학회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지난달 ‘아산 정주영 서거 25주기 추모 음악회’에서 “제가 만약 할아버님께 연주회 내용을 여쭸으면, ‘이봐! 뭘 망설여, 해 봐!’라고 하셨을 것”이라고 고인을 추억했다. 오는 3월 21일은 고(故) 정주영 창업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되는 날이다. 4반세기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봐, 해봤어?”로 대표되는 그의 존재와 메시지는 여전히 한국 산업사의 중심에 남아 있다.
한국 경제의 발전을 이야기할 때 정주영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기업인의 범주를 넘어선다. 필자가 강의한 ‘정주영 학’에서 강조하는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기업을 만든 기업가’가 아니라 ‘산업을 만든 기업가’였다. 정주영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대한민국의 산업 구조 그 자체였다. 자동차부터 건설, 조선, 중공업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기간산업 상당수가 그의 도전 속에서 시작됐다.
 | | 1985년, '엑셀' 신차 발표회장에서 아산 정주영(사진=현대차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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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정주영 기업가 정신의 첫번째는 ‘도전’이다. 정주영 회장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영역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자동차와 조선 산업은 당시 한국 경제 수준에서는 무모한 선택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미래 산업의 가능성을 먼저 보고 도전했다. 현대건설은 산업화 시대 도로와 항만, 발전소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이끌었고 울산 조선소는 세계 조선 산업의 판도를 바꾸는 출발점이 되었다. 당시 세계 조선 산업은 유럽과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는 텅 빈 바다를 바라보며 세계 최대 조선소를 구상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자동차 산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한국에서 자동차 산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자동차 산업이 미래 한국 경제의 핵심 산업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결단의 결과 위에서 살고 있다. 그가 세운 산업은 단순히 한 기업의 성공을 넘어 수많은 협력기업과 기술 축적을 가능하게 하며 한국 경제의 산업 구조 자체를 바꿨다.
둘째, 실행의 원칙이다. 그는 전략보다 행동을 먼저 선택했다. “이봐, 해봤어?”라는 질문은 바로 실행을 강조하는 리더십의 상징이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경영 방식이었다. 이 말은 단순한 낙관의 표현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길을 만드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는 조건이 갖춰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도전하고 실행하면서 조건을 만들어가는 기업가였다. 2000년대 초반 필자가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던 시절, 현대자동차그룹의 글로벌 확장 전략 역시 이러한 실행 중심의 기업가정신에서 비롯됐다.
 | | 2월 25일 '아산 정주영 서거 25주기 추모 음악회 : 이어지는 울림'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는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 (사진=현대차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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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는 2002년 미국 앨라배마 공장 건설을 결정하며 본격적인 글로벌 생산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이어 중국 베이징 현대 공장과 체코 및 슬로바키아 생산기지 등 해외 생산 네트워크를 확대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자동차 기업이 주요 자동차 시장에 직접 생산 공장을 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아산의 철학을 계승한 정몽구 당시 회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지 생산과 품질 경쟁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전략은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현대자동차 브랜드의 신뢰도를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고, 이후 글로벌 판매 확대의 기반이 됐다.
셋째, 현장 중심의 원칙이다. 그는 늘 현장에서 답을 찾았다. 사무실보다 공사, 공장 현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문제를 책상 위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해결하는 리더였다. 이러한 정신은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현대차그룹의 성장에서 그 상징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차·기아는 2022년 글로벌 완성차 판매 3위에 오른 뒤 작년까지 4년째 3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작년에는 영업이익에서 폭스바겐그룹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기술을 도입하던 기업이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핵심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000년대 초 현대자동차그룹은 글로벌 시장에서 품질과 브랜드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정몽구 회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경영’을 경영의 핵심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울산공장과 아산공장, 해외 생산기지를 직접 방문하며 생산 공정과 품질 문제를 하나하나 점검했다. 특히 자동차 품질 문제에 대해서는 “품질이 곧 브랜드”라는 원칙을 강조하며 생산 현장에서 직접 개선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장 중심 경영은 품질 혁신을 통해 현대자동차의 글로벌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 | 1979년 서산 방조제 공사를 통하여 1억5537㎡(4700만 평)의 바다가 대규모 농지로 바뀌었다. 일명 "정주영 공법"으로 물막이 공사 완료된 서산 방조제 (사진=현대차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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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창조적 개척의 원칙이다. 그는 기존 시장에 참여하기보다 새로운 산업을 개척했다. 자동차, 조선, 중공업과 같은 산업은 당시 한국에 존재하지 않던 산업이었다. 더 주목할 점은 이러한 도약이 창업자의 아들 세대를 넘어 손자 세대인 정의선 회장에게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기업 성장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창업자의 기업가정신이 조직의 문화와 전략 속에 살아 남아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금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자동차 기업을 넘어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다. 전기차와 수소에너지를 중심으로 자율주행, 로보틱스,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등 새로운 영역으로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세계 산업 분석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평가한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기업에서 이동과 에너지, 로봇 기술을 아우르는 미래 산업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정주영 창업회장이 남긴 기업가정신의 DNA가 자리 잡고 있다. 새로운 산업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미래를 먼저 상상하고 실행하는 리더십, 그리고 산업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책임감이다.
 | | CES 2026 전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아틀라스 (사진=정병묵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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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도 역시 이러한 변화를 주목하고 있다.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현대차그룹을 “전기차와 미래 모빌리티 전환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자동차 기업 가운데 하나”라며 전통 완성차 기업 가운데 가장 공격적인 혁신 전략을 추진하는 기업으로 분석했다. 미국 블룸버그 역시 현대차의 성장 과정을 두고 “후발 자동차 기업이 기술 투자와 생산 혁신을 통해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경쟁 구도를 바꾼 대표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특히 전기차와 배터리,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전략에서 빠르게 경쟁력을 확보한 점을 강조했다. 또한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현대차그룹을 “전통 제조기업에서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는 아시아 산업 혁신의 상징적 사례”라며 자동차 기업이 로봇, 에너지, 모빌리티 서비스로 확장하는 새로운 산업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섯째, 공동체 책임의 원칙이다. 그는 기업의 성장이 국가와 사회의 발전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기업은 단지 이윤을 창출하는 조직이 아니라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이었다. 정주영은 늘 기업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이해했다.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는 조직이지만 동시에 사회와 국가 속에서 성장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이었다. 산업을 통해 국가가 발전하고 국민의 삶이 나아져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그의 기업가정신은 경제 영역을 넘어 사회와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는 가능성을 믿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다. “할 수 있다”는 집단적 자신감이야말로 산업 발전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기업경영학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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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는 또 다른 전환점에 서 있다. 인구 감소와 기술 혁명, 글로벌 경쟁 심화는 이전과 다른 도전을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성장 방식만으로는 미래를 설명하기 어려운 시대다. 이런 때일 수록 우리는 정주영의 질문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의 “이봐, 해봤어?”라는 질문은 단순한 도전의 구호가 아니다. 행동하지 않는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며 가능성을 포기한 시대에 대한 경고다. 정주영은 산을 옮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길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 길 위에서 한국 산업의 새로운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정리=이데일리 정병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