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도 잠시 멈춰서는 곳… 그곳에 나를 두고오다

조선일보 기자I 2008.04.03 11:23:34

1년 52주 당일치기 여행 - 양평 간이역

[조선일보 제공] 봄바람이 불면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한적한 간이역에 앉아 기억이 가물가물한 옛사랑을 맘껏 떠올리고 싶고 젊은 시절 잔디밭에서 마시던 걸쭉한 막걸리로 세상살이에 갈라진 마음을 채우고도 싶어진다. 산새 지저귀는 오솔길을 걷고, 탁 트인 물줄기를 바라보며 심호흡도 할 수 있는 곳 없을까. 작은 간이역과 구수한 막걸리를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경기도 양평으로 떠났다.

▲ 경기도 양평 구둔역. 하루 열차 서너 대가 정차하는 작은 간이역이다. /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08:30 양평 구둔역에서 추억 찾기

청량리를 출발한 열차는 덜컹덜컹 한 시간 30분을 달려 구둔역에 닿는다.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구둔역은 간이역이다. 하루 90여 대의 열차가 구둔역을 지나가지만 그중에서 정차하는 건 고작 3, 4대뿐. 구둔역에 서는 기차를 타려면 미리미리 시간표를 체크한 후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한다.

기차표도 팔지 않는 작은 역사는 아담하기 그지없다. 매표소가 없으니까, 구둔역에서 기차를 탄다면 열차 내의 철도 승무원에게 기차표를 구입해야 한다. 사진 한 장에 쏙 들어가는 역사(驛舍)는 흰 벽에 뾰족한 지붕을 이고 건물 하단에는 초록 페인트를 칠해 동화 속 건물처럼 보인다.

지금은 인적이 드물지만 약 10년 전만 해도 구둔역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새벽부터 경동시장으로 약초 팔러 가는 할아버지,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들로 역사는 북적거렸다고 한다. 사람 냄새가 풀풀 나던 구둔역은 이제 '등록문화재 제296호·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 되었다. 구둔역 역사에 앉아있다 보면 편지 한 장이 쓰고 싶어진다. 부쳐도 좋고 아니 부쳐도 좋은 이야기를 말이다.

10:30 지평 막걸리 술도가 돌아보기

가슴 끝이 뭉클해질 때, 쩍쩍 갈라져 가는 인정과 감성을 보듬어줄 막걸리가 필요하다. 구둔역에서 가까운 지평리에는 마침 좋은 술도가가 있다. 1925년 문을 연 '지평 막걸리'다. 앞쪽에 선 버드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면 폐허처럼 보일 건물이지만 백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이곳 지평막걸리 술도가에서는 아직도 옛날 방식으로 막걸리를 빚는다. 밀가루 막걸리는 5일 쌀 막걸리는 6일이 걸리는데 두 팔을 벌려 안아도 그 품이 닿지 않는 360L짜리 옹기항아리가 눈에 띈다. 소리와 냄새만으로도 막걸리의 숙성 정도를 알아내는 20년 이상 경력의 기술자 세 명이 만드는 막걸리 제조 공정은 오후에만 볼 수 있다.

소주와 맥주에 밀려 전국의 막걸리 술도가 중 약 70%가 문을 닫은 80년대를 견디고도 살아남은 지평막걸리의 힘은 바로 '맛'이다. 길 건너에 자리한 판매장은 단 한 곳. 도보 2~3분 거리의 허름한 막걸리 판매장에 들어서면 이리저리 쌓여 있는 막걸리 병과 통이 정겹기 그지없다. 1.7L 들이 병 막걸리는 지평막걸리(밀가루가 원료)가 1700원, 지평쌀막걸리(쌀이 원료)가 1900원이며 행사용으로 좋은 통막걸리는 20L에 1만4000원(통 값 3000원 별도)이다. 막걸리 한 병을 손에 넣으면 그 맛을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다. 어머니의 젖빛처럼 뽀얗고 찰지고 단 막걸리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기면 식도를 따라 알싸하게 넘어가는 맛에 눈물이 찔끔 난다.



12:00 용문사 산채 비빔밥과 산책

아침 일찍부터 곤한 행보를 했으니 뱃속에서 신호를 보낸다. 천년 고찰 용문사(龍門寺) 아래쪽 식당가를 찾아보자.

용문산 자락에서 자란 나물을 데치고 무치고 볶아 내 놓은 산채비빔밥은 오색 자연을 맛보는 행복식단이다. 이중 34년 전통의 중앙식당(031-773-3422)과 송림식당(031-773-4165)이 유명하다. 모두 산채비빔밥(6000원) 전문으로 된장국이 곁들여 나온다. 산채정식(8000원)을 시키면 된장찌개가 서비스다. 도토리묵(중앙식당 6000원, 송림식당 8000원)까지 더하면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식사 후에는 소화도 시킬 겸 사찰 주변을 걸어보자. 20분 정도 걸리는 용문사까지 올라도 좋다. 울창한 송림(松林)과 돌돌돌 흐르는 계곡물이 도심의 걱정과 먼지를 씻어준다.

15:00 두물머리에서 조용한 시간

이제 슬슬 하루 일정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사진촬영지로 유명한 두물머리가 차로 30~40분 거리다. 사계절 다른 모습을 띠는 두물머리는 봄이면 파르스름해진 물빛 때문에 황포돛배의 황토 빛이 더욱 진해 보인다.

330도로 펼쳐지는 물줄기가 시원하기 그지없으며,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힘찬 에너지를 탄생시키는 조용하고도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힘이 끓어오른다.


자가용― 서울에서 구리-양수리를 지나 양평으로 가는 6번 국도를 이용한다. 용문에서 우회전해 331번 지방도를 타고 지제 방향, 일신교 넘어 좌회전하면 구둔역이다.

대중교통― 청량리에서 구둔역까지: 청량리 발 오전 7시(구둔역 도착 오전 8시26분)를 타고 가서 구둔역 발 오후 6시15분(청량리 도착 오후 7시32분)으로 돌아오는 것이 당일치기 여행으로 적당하다(어른 4700원·어린이 2400원, 편도 기준). 구둔역까지 가는 기차는 하루 3회(오전 7시·낮 12시·오후 6시57분), 돌아오는 편은 4편(오전 6시·8시10분·낮 12시15분·오후 6시15분) 있다. 돌아올 때는 두물머리에서 경기 고속 2228번(10~15분 간격)을 타고 청량리까지 바로 오는 게 편하다.

구둔역에서 지평막걸리 술도가까지: 구둔역 광장에서 대원고속(여주시내버스) 7-1번을 타고 지평사거리에서 내린다. 20분 소요. 1000원
지평막걸리 술도가에서 용문까지: 지평사거리에서 대원고속 7-1을 타고 용문에서 내린다. 25분 소요. 1000원.

용문에서 두물머리까지: 용문사에서 양평 시내로 가는 버스(용문사 출발 오후 12시40분·1시 50분·25분소요·1200원)를 타고 양평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두물머리행 버스(20분 간격·시내버스 1300원, 직행버스 1800원)로 바꿔 탄다.

※양평 내에서는 버스 노선이 불편하니 택시를 이용하는 방법도 고려해보자. 지평택시 (031-774-8582)는 미터기를 기준으로 요금을 받는다. 콜비 1000원 별도. 구둔역-지평막걸리 약 1만원, 지평막걸리-용문사 구간 요금은 약 1만3000원, 용문사-두물머리는 약 3만5000원 정도지만, 교통 흐름에 따라 요금이 더 올라가기도 한다.

구둔역 (031)773-7733, 지평막걸리 술도가 (031)773-7030, 양평 버스 터미널 (031)772-2342, 대원고속(여주 시내버스) (031)884-9286,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031)770-2061 www.yp21.net

청량리-구둔역-지평막걸리 술도가·판매장-용문사 식당가에서 점심 식사-두물머리에서 구둔역으로 이동 또는 두물머리에서 버스로 서울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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