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운용관리·자산관리 수수료 중 회사 부담분은 회사가 내고, 펀드 보수는 상품 안에서 차감됩니다. 저희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만, 수익률은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라…”
은행 창구에서 항의하는 고객과 난처해하는 직원의 대화,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사실 이 대화에서 수수료라는 말은 한 덩어리가 아닙니다. 퇴직연금 제도 자체를 운영하고 자산을 보관하는 수수료가 있고, 펀드 같은 실적배당상품 안에서 적립금으로부터 빠져나가는 보수가 있습니다. 회사가 부담하는 비용도 있고, 가입자의 계좌 수익률에 반영되는 비용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질문은 조금 달라집니다. “내가 수수료를 냈느냐”가 아니라, “그 비용을 치르는 동안 누가 내 편에서 성과와 비용을 함께 점검하고 있느냐”입니다. 직원의 말은 법적으로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엇갈린 대화 속에 한국 퇴직연금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의 부재’입니다.
쉽게 말해, 한국에는 내 돈을 맡아주는 ‘창고지기(Custody)’는 있지만, 내 돈을 자기 돈처럼 아끼고 불려주는 ‘청지기(Fiduciary)’는 부재한 상황입니다.
‘있으나 마나 한’ 의무 — 문구는 있어도, 지키게 할 장치가 없다
우리나라 법(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선진국이 말하는 수탁자 책임의 핵심 문구는 이미 담겨 있습니다. “가입자를 위하여”라는 문구(오직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하라는 충실 의무)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라는 문구(전문가 수준의 주의를 기울이라는 주의 의무)가 조문에 나란히 들어 있습니다. 문구만 보면 한국도 이미 두 축의 수탁자 책임을 갖춘 셈입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 문구를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장치, 즉 의사결정에서 관리, 실행 그리고 피드백으로 이어지는 거버넌스(Governance)의 순환 고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업은 퇴직급여 재원을 외부 금융기관에 쌓아두는 ‘사외적립’만 하면 의무를 다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 그 돈이 실제로 잘 굴러가는지 감시할 책임은 사실상 없습니다. DB형에는 그나마 ‘적립금운용위원회’가 있지만, 구성과 운영에 빠져나갈 여지가 많아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금융기관은 계약형 구조를 방패 삼아 “상품은 가입자가 직접 선택했으니, 결과의 책임도 가입자의 몫”이라는 논리를 폅니다. 어느 경우에도, 이 의무를 실제로 이행했는지 점검할 명확한 위원회를 두라는 요구가 없습니다.
그 결과 “가입자를 위하여”,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라는 법 문구는 법전 속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실제 해석과 운영에서는 “법규만 어기지 않으면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소극적 방어로 쪼그라듭니다. 수익률이 0%가 되든 마이너스가 되든, “나는 정해진 절차를 지켰다”고 말할 수 있으면 책임을 묻기 어렵습니다. 반면 연금 선진국들은 이 문구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장치, 즉 명확한 수탁자 지정과 위원회 거버넌스를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탁자 책임은 ‘적극적 관리’의 의무가 됩니다 — 결과를 보장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왜 그런 상품을 고르고 왜 계속 유지했는지 합리적인 절차와 근거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퇴출당할 수도 있습니다.
구조적 모순 — 이해상충의 딜레마
강력한 청지기가 부재한 상황에서, 한국의 퇴직연금 시장은 구조적인 이해상충의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금융기관은 ‘연금 사업자’로서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수익을 내야 하는 기업입니다. 이 두 역할은 언제나 완전히 겹치지 않습니다. 때로는 고객의 장기 수익률보다 자사의 이익이나 판매 전략이 앞서는 상황이 생깁니다. 기업 담당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회사 대출 금리 얼마나 깎아줄 건가요? 업무 처리는 얼마나 편한가요?” 이런 거래 구조 속에서 정작 돈의 주인인 근로자의 이익은 뒤로 밀리기 쉽습니다. 이것을 감시하고 막아설 제도적 대리인이 약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인 없는 돈’의 비극입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우리는 지난 20년간 이 거대한 돈을 방치해 두었습니다. 개인은 전문성이 부족하고, 기업은 본업이 중요하며, 금융기관은 제도적 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근로자를 대신할 강력한 대리인을 세우는 것입니다. 단순히 돈을 보관하는 것을 넘어, “수익률이 나쁘면 너희를 해고하겠다”고 호통칠 수 있는 진짜 주인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달란트 비유가 이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짚습니다. 주인에게서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은 세 명의 종이 있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 돈을 불려서 칭찬받았지만, 손해가 두려워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은 오히려 책망받았습니다. 지금 한국의 퇴직연금사업자는 이 세 번째 종과 가장 가깝습니다. 그런데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책망조차 받지 않습니다. 현행 계약형 제도에서는 애초에 위탁자 본인이 운용 대상을 정하는 구조가 강하기 때문에, 사업자가 ‘충실 의무·주의 의무·정보제공 의무·자산관리 의무’를 운용 결과에 대한 적극적 책임으로까지 지기 어렵습니다. 돈을 불려도 칭찬받을 이유가 약하고, 땅에 묻어도 책망받을 이유가 약한 구조인 것입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기금형 퇴직연금 활성화는 바로 이 공백을 겨냥합니다. 법 문구로만 존재했던 충실 의무·주의 의무를, 명확한 위원회 구성과 수탁자 지정이라는 거버넌스 장치로 실제 작동시키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거버넌스를 그리고 있는지는 Part 3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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