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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탄 발포 부른 축구 열기..마지막 경평전 [그해 오늘]

장영락 기자I 2025.03.25 07:02:18

1946년 3월 25일, 경성운동장서 마지막 경평전

[이데일리 장영락 기자] 79년전인 1946년 3월 25일 서울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마지막 경평대항축구전이 열렸다. 해방 후 처음 열린 경평전이었던 터라 경기가 과열돼 관중 난동까지 발생했는데, 축구팬들이 국내 리그는 물론 해외축구도 열성적으로 챙겨보는 요즘 문화는 나름 전통이 있었던 셈이다.
1946년 3월 25일 경평전 기념촬영 사진. 서울역사편찬원 자료.
경평전은 1929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던 정치인 여운형이 서울과 평양의 도시 대항 축구 경기를 구상한 끝에 처음 열렸다. 분단 전인 당시만 해도 서울과 평양은 각각 제1, 제2의 도시로 모두 황해권에 자리해 멀지 않은 도시였던 터라 지역 라이벌 의식이 강했다.

여기에 일제 핍박으로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보니 경평전은 1935년까지 계속되면서 서울, 평양시민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심 속에 치러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재 정부가 스포츠를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썼던 사례와 달리, 식민지에서 열린 도시 대항전은 오히려 피지배 대중들의 공동체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에는 팀이 아니라 군(軍)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경평전은 경성군과 평양군 대결로 진행됐다. 양팀은 대체로 스포츠 활동 기반이 있던 대학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고 분단 이후에 경성군과 평양군 자체가 남북한 국가대표팀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경평전은 축구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켜 전국에서 선수들이 몰려들었고, 경평전 자체는 중단됐으나 1938년에는 서울, 평양, 함흥 3도시 대항전, 서울을 중심으로 10개 팀이 참여한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등이 대형 스포츠 이벤트의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쟁에 몰두하던 일제가 1942년 강제동원을 위해 조선 전역에서 구기종목대회를 금지해버리면서 경평전은 해방 후에야 다시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됐다.

북한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1946년 3월 25일 후일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 후 지금은 철거된 경성운동장에서 해방 후 처음이자 마지막 경평전이 열렸다.

이틀 동안 대회가 열렸는데, 경기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 만원 관중이 된 것은 물론 흥분한 팬들이 난동을 일으켜 경찰이 공포탄을 발포해 이들을 해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초 치러질 예정이던 3차전은 당연히 취소됐다.

축구에서 벌어진 감정싸움은 분단 체제 하 정부 수립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던 당시의 정치적 혼란상도 어느 정도 반영한다. 이 갈등은 관중 난동과는 비교도 안될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비화됐고, 그렇게 경평전은 예전 기록에서나 찾아볼 과거로만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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