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의 간절한 기다림 ''인왕산 붙임바위''

조선일보 기자I 2009.01.08 11:50:00

빌딩과 차에 묻힌 서울의 전설

[조선일보 제공] 곧은 선비 김안국이 살던 안국동

종로구 안국동(安國洞)의 동 이름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김안국(金安國·1478~1543)에서 비롯됐다. 성품이 어질고 근검한 김안국은 흐트러짐이 없기로 유명했다. 어느 날 평소에 그를 흠모하던 '박 낭자'가 담장을 넘어 그를 찾았다. "학문에 지장이 있으니 물러가시오"라며 김안국은 낭자를 혼내며 내쳤다. 세월이 흘러흘러 김안국은 과거시험에 합격해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지만 누명을 써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때 그를 구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박 낭자였다. 박 낭자는 "김안국은 곧은 선비로 그럴 리 없다"며 왕비를 몸소 찾아가 설득했다고 한다. 옳은 길을 걷게 해준 김안국에게 박 낭자는 과거의 처신을 반성하고 보은했다는 이야기.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허생전' 무대 묵정동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의 배경은 남산 아랫마을 중구 묵정동(墨井洞)이다. 조선 정조 시대 이 마을은 가난한 선비들이 많이 살기로 유명했다. 허생전의 주인공 허 생원도 관직에 나가기 위해 공부하던 '남산골 샌님'이었다. 7년 넘게 아내의 삯바느질 수입으로 근근이 연명하던 허 생원은 가난을 못 이겨 장안 갑부 변씨를 찾아가 거금을 빌렸고 그 돈을 밑천으로 장사를 벌여 큰돈을 벌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번 돈을 전부 나누어주고 다시 남산골로 들어가 청빈하게 살았다고 한다.

정월 보름엔 광교로 가세요

청계천 복원 공사로 다시 세상 빛을 본 광교(廣橋). 조선 태종 때 왕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이 다리는 당시 대광통교(大廣通橋)라 불렸다. 조선시대 대광통교는 겨울철 놀이 장소로 유명했다. 특히 정월대보름이면 다리 밟기를 하기 위해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로 모였다. 보름날 저녁, 보신각 종 소리에 맞춰 자신의 나이만큼 다리를 밟으며 오고 갔다. '다리로 다리를 밟으면 장수한다'는 속설 때문이다. 다리는 남자들이 먼저 밟고 여자들이 나중에 지나갔다. '다리가 안전한지 남자가 먼저 살핀다'는, 서양식 '레이디 퍼스트'와 사뭇 다른 한국식 배려가 엿보인다.

비 맞으면서도 백성 걱정한 유관 정승

조선 초기 명신 하정 유관(夏亭 柳寬·1346~1443)은 올곧은 청백리 정신으로 유명한 정치가다. 정승까지 올랐던 그는 지금의 종로구 창신동(昌信洞) 북쪽 산기슭에 살았다. 그는 욕심이 없고 청빈해 울타리도 없는 초가삼간에 만족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방안에 빗물이 흘러들었지만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방안에서 우산을 들고 여유 있게 책을 읽던 유관을 보며 부인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우산이 없는 사람은 오늘 같은 빗속에서 어떻게 지낼까." 이런 유관의 집터엔 소나무 열 그루가 우산처럼 서 있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동대문에서 청량리로 가는 '하정로'는 유관 정승을 기념하기 위한 도로다.

간절한 신부의 바람 담긴 '인왕산 붙임바위'

인왕산 동쪽 기슭에는 구멍이 송송 뚫린 '붙임바위('부침바위'라고도 쓴다)'의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몽골에 끌려가던 때였으니 신혼을 맞은 새신랑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부터 신랑이 돌아오길 빌며 신부는 뒷산에 올라 큰 바위에 작은 돌을 문질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신랑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순간 신기하게도 그 돌이 바위에 철썩 붙어버렸다. 그 후 소문을 들은 여인들이 바위에 돌을 열심히 문질러 벌집처럼 움푹움푹 구멍이 생겨버렸다. 원래 위치는 '종로구 부암동 134번지', 부암동(付岩洞)이란 이름의 유래가 된 바위는 '자하문길'을 넓히는 통에 사라져버렸다. 부암동 주민센터에 붙어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만 '전설'이 전해질 뿐이다.

자료 제공=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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