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약가 인하, 미리 보는 손익계산서

이데일리 기자I 2026.02.13 05:00:00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이사 기고
건보 재정 살리려는 고육책, 국내 신약개발 기반 흔들어
재정 아끼려 약가 내린 나라들
타국 제약산업 의존 커지며 약값 폭등에 환자 고통만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이사] 한국에 물질특허 제도가 도입돼 한국 제약사들의 위기론이 대두한 1987년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로 대한민국 전체가 절망의 수렁에 빠졌던 1997년. 공교롭게도 필자가 경영을 맡고 있는 한미약품은 이 시기 즈음 한국 제약회사 최초의 기술 수출(로슈, 세프트리악손 제조법)과 당시 최대 금액의 의약품 제조기술 이전 계약(노바티스, 마이크로에멀전 기술)을 체결하며 한국 제약산업은 물론 한국 산업계에 큰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었다.

척박했던 한국 제약시장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은 두 사건은 연구개발(R&D)을 당신의 생명처럼 생각한 한미약품 창업주 고 임성기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바탕에는 국민과 정부가 한국 제약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몇 차례 기술 반환의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한미약품이 지난 2015년 한국 제약산업 사상 최대 규모의 ‘신약 라이선스 아웃(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해 제약바이오 생태계를 완전히 바꿀 수 있었던 기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는 한국 제약회사들이 사회적 신뢰와 제도적 기반 위에서 성장의 기회를 마련했고 지속적인 R&D 투자로 축적해 온 결과가 마침내 결실로 이어졌다는 의미다.

최근 정부가 국산 전문의약품(제네릭·복제 의약품)에 대한 약가인하를 추진하고 있다. 한정된 건강보험 재정 안에서 보건의료계 전부의 살림을 책임지는 시스템 하에서 약품비를 더 줄이고자 하는 정부의 방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다만, 이제 막 꽃을 피우려는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 생태계가 다시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그러한 이해의 마음을 압도한다. 단기적인 재정 절감 효과를 누리기 위해 의약품 가격을 크게 낮췄던 가까운 일부 동남아 국가들이 2026년 현재 결국 자국 시장의 90% 이상을 타 국가 제약회사들에 빼앗겨 오히려 약값 폭등 현상을 겪는 사례가 남의 일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전자기기, 정보기술(IT) 등 분야와 달리 제약 분야에서 혁신적인 제품이 개발되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실패 확률 또한 매우 높다. 이 때문에 양질의 의약품을 개발하고자 하는 제약회사에 가장 절실한 환경은 단순히 ‘매출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예측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실패 확률이 높은 제약산업의 고위험 구조를 고려할 때 급격한 약가 인하는 필연적으로 혁신의 동력을 약화시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가 인하냐 유지냐’의 이분법적 접근이 아니라 험난한 신약개발 과정과 그 실패까지도 끌어안아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안전판이다. 과학기술 지원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이번 정부도 기업인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연일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의미에서 한국 제약회사들이 개발한 전문의약품들은 ‘비용 절감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적 투자 기반’이다. R&D 역량을 갖춘 산업 기반이 유지될 때 미래 감염병 대응, 고령 사회 질환 관리, 글로벌 시장 진출, 제약주권 확보라는 네 가지 과제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한미약품은 ‘제약주권 확보’, ‘한국 제약기술의 자부심’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러한 국가적 비전 과제에 적극 동참할 계획이다. 전 세계 의약품 시장 트렌드를 주도하는 혁신적인 대사질환 치료 신약의 국산화도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제약·바이오 산업의 건강한 생태계 조성을 위한 정부의 보다 의연하고 담대한 약가 정책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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