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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리니언시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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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기자I 2026.10.27 05: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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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고백 없이 적발 어려워
밀실 담합 깨뜨릴 고육지책
공정위 담합 근절방안 긍정적
리니언시 조건 강화는 아쉬워
자진신고 이끌 당근도 고민을

[기고]리니언시를 위한 변명
[안병훈 토스인사이트 정책자문위원·전 공정위 조사관리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아들을 유괴해 숨지게 한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힘겹게 교도소를 찾은 신애(전도연 분)는 뜻밖에 평온한 얼굴과 마주한다. 범인은 옥중에서 신앙을 얻었고 하느님께 용서받아 마음의 평화를 얻었노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피해자는 아직 지옥 같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데 스스로 죄를 고백했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자는 이미 용서받은 사람이 돼 있었다. 신애에게는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마저 없었다.

담합을 털어놓은 기업의 처벌을 면제해 주는 자진신고 감면제도(리니언시)도 이와 닮았다. 기업은 막대한 부당이익을 챙기고도 먼저 고백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는다. 그럼에도 미국과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세계 주요 경쟁당국은 리니언시를 담합 규제의 핵심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가해자의 죄를 면제하는 도덕적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내부자의 이탈을 끌어내 카르텔 전체를 무너뜨리는 편이 시장과 다수 소비자에게 훨씬 큰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밀실에서 합의하고 흔적을 지우는 담합은 내부 고백 없이는 적발이 어렵다. 2023년 과징금이 부과된 담합 사건 147건 중 93건(63.3%)에 리니언시가 적용됐다. 리니언시는 도덕적 관용이 아니라 면책을 미끼로 공범들이 배신하도록 고안된 고육지책이다.

이러한 유인책이 실효성을 거두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미국 법무부 반독점국에서 부차관보를 지낸 스콧 해먼드는 엄중한 제재, 적발에 대한 두려움,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 등 세 가지를 리니언시의 성공조건으로 꼽았다. 여기에 먼저 신고한 쪽이 가장 큰 혜택을 누리는 선착순 구조가 더해져야 공범들이 앞다퉈 당국의 문을 두드린다.

그런 점에서 공정위가 9월 입법예고한 개편안과 당정이 발표한 반복 담합 근절 방안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조사 개시 후 1순위의 감면을 75%로 낮춰 선착순 경쟁을 강화했고 5년 이내 2회 이상 담합한 사업자에 대한 등록취소·영업정지 방침도 담합 근절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철퇴가 자칫 고해의 문까지 함께 닫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개편안은 제재받은 날부터 5년 이내 다시 담합한 사업자에게는 사업 분야와 무관하게 자진신고 감면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고해도 감면은 없고 퇴출 위험만 남는다면 버티다 적발돼 죽으나 털어놓고 죽으나 매한가지다. 이런 기업이 공정위의 문을 두드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랜 담합의 전모를 꿰고 있는 쪽은 대개 그 판을 되풀이해 짜 온 반복 가담자일 가능성이 높다. 가담자 대부분이 담합 전력자인 시장이라면 배신할 유인은 사라지고 카르텔은 더 단단해질 수 있다. 담합이 잦아 등록취소·영업정지 대상이 된 민생 밀접 17개 업종처럼 근절이 절실한 곳일수록 적발은 더 어려워진다. 해먼드가 말한 적발에 대한 두려움도 기업이 살아 있을 때 얘기다. 형사정책의 관점에서도 엄벌의 수위를 높일수록 협조의 통로를 함께 열어 둬야 제재의 실효성도 커진다는 점을 고려해 줬으면 한다. 퇴로가 막힌 기업은 순응하는 대신 배수진을 치게 마련이다.

한 가지 대안을 제안하고 싶다. 5년 이내 반복 담합 사업자라도 조사 개시 전 1순위로 신고하고 끝까지 협조한다면 등록취소·영업정지만큼은 면제해 주되 과징금은 10년 이내 반복 담합처럼 절반으로 줄이거나 아예 감경해 주지 않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엄벌은 하되 공범을 배신할 마지막 문 하나는 열어두자는 것이다.

‘밀양’을 보며 느낀 불편함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협조자의 퇴로마저 완전히 끊어버린다면 시장에는 끝내 드러나지 않는 침묵의 카르텔만 남고, 그 비용은 결국 소비자에게 돌아온다. 공정위는 이미 옳은 방향으로 첫발을 뗐다. 엄벌과 협조 유인이 맞물려 돌아가는 개편으로 마무리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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