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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이 지면에서 추경의 규모와 대상을 원칙에 따라 정해야 한다고 썼다. 5월에는 재정개혁을 통해 전년 대비 증감 방식에서 벗어나는 제로베이스 예산을 강조하고 선거철 선심성 공약이 장기적인 부담으로 굳어지는 것을 경계했다. 6월에는 반도체가 끌어 올린 경제지표의 착시를 지적했다. 이러한 네 차례의 문제 제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정부와 국회는 반도체 호황이 기대에 못 미쳐도 감당할 예산을 짜고 있는가.
이미 쌓인 빚부터 보자. 지난해 말 중앙·지방정부의 국가채무(D1)는 1305조 2000억원이다. 규모뿐 아니라 불어나는 속도도 문제다. 한 해 동안 130조 2000억원이 늘었다. 2016년 626조 9000억원에서 9년 만에 두 배를 넘어섰다. 같은 기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도 34.2%에서 지난해 말 48.8%로 치솟았고 올해는 50% 선을 넘어설 전망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기준 비기축통화 선진국 중 부채비율 상승 속도가 최고 수준이라는 경고가 나오는 배경이다. 고령화로 쓸 돈은 늘어나는데 이자 부담까지 커지면 정작 필요한 곳에 쓸 예산이 줄어든다. 뜻밖의 세입이 생겼을 때 채무상환을 최우선에 놓아야 하는 이유다. 빚을 갚으면 해마다 나갈 이자를 줄이고 다음 위기에 대응할 선택권을 남긴다. 재정의 성과는 더 쓴 돈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봄 추경의 선택은 달랐다. 정부가 편성한 26조 2000억원의 추경 패키지에서 세출 확대는 25조 2000억원, 국채상환은 1조원이었다. 전체의 3.8%를 상환에, 96.2%를 지출 확대에 배정했다. 추가로 빚을 내지 않았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진 빚을 줄일 기회를 얼마나 살렸는지도 물어야 한다.
문제는 내년 예산이다. 정부의 9월 재추계에 따르면 올해 국세수입은 478조 6000억원으로, 당초 예산보다 88조 4000억원 많을 전망이다. 봄 추경에 반영한 25조 2000억원을 제외해도 추가 증가 전망은 63조 2000억원이다. 이 돈의 사용 방향이 내년 이후 나라 살림을 좌우한다. 2027년 예산안의 총지출은 820조 9000억원으로 올해 본예산보다 93조원, 12.8% 늘어난다. 내년 법인세 전망은 216조 7000억원으로 올해 재추계액 136조 4000억원보다 약 59% 많다. 기업 이익이 크게 늘 것이라는 기대가 예산을 떠받치고 있다. 나라 살림이 소수 반도체 기업의 실적에 크게 기대는 구조다. 세입은 가변적인 전망이지만 확정된 지출은 되돌릴 수 없는 약속이다. 핀란드의 경험은 특정 기업에 대한 의존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2003년 노키아 한 회사가 낸 세금은 전체 법인세의 약 23%였다. 이후 노키아를 비롯한 주력 산업의 부진은 경제와 재정에 큰 부담을 줬다. 한 기업의 호황을 나라 살림의 항구적인 재원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명목성장률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올해 전망치는 명목성장률 22.0%, 실질성장률 3.5%다. 반도체 수출가격 상승 등 가격 변화가 두 성장률의 격차를 크게 벌렸다. 이를 생산량 증가로 받아들이면 착시가 된다. 물건 100개를 개당 1만원에서 1만 2000원에 팔면 매출은 20% 늘지만 생산량은 그대로이듯 국민 살림이 20% 넘게 윤택해진 것은 아니다. 단가 하락 시 줄어들 일시적 세수를 믿고 고정비를 늘리면 위기를 자초한다. 명목 GDP가 커져 국가채무비율 수치가 낮아져도 갚아야 할 빚 원금은 줄지 않는다.
정부 예산에는 한번 늘리면 경제 상황이 나빠져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지출의 톱니효과(Ratchet Effect)’가 작용한다. 전년도 예산이 다음 해 심의의 출발점이 되고 새 사업에는 담당 조직과 수혜자가 생긴다. 지원은 기대가 되고 시간이 지나면 권리처럼 받아들여진다. 법정 급여와 인건비, 계속사업은 불황이 와도 깎기 어렵다. 일시적 수입이 고정 지출로 굳어지면 경기 침체기에는 세수 부족을 메우려 다시 빚을 내는 악순환에 빠진다. 호황기에 빚을 줄여야 다음 위기 때 국민을 지킬 재정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
초과세수를 모아 미래 산업에 투자하고 세수 결손 시 꺼내 쓰겠다는 ‘미래대응기금’도 문제다. 기금에 돈을 쌓아두는 동안에도 갚지 않은 빚에는 이자가 붙는다. 기금 수익이 그 이자보다 적으면 나라 전체로는 손해다. 예컨대 3% 이자의 빚 50조원을 갚으면 연 1조 5000억원의 이자를 아끼지만 이를 연 2%로 굴리면 수입은 1조원에 그쳐 나라 전체로는 연 5000억원의 역마진이 발생한다. 기금 구상에는 45조 4000억원의 사업비가 포함돼 있다. 중요한 것은 돈을 꺼내 쓰는 조건과 국회의 통제가 얼마나 엄격한지다. 인출 한도와 심의 절차가 느슨하면 미래를 위한 저축이 당장의 지출을 늘리는 우회 통로로 바뀔 수 있다. 일시 재원 50조원으로 매년 10조원씩 쓰면 5년 뒤 원금은 바닥난다. 6년 차에는 지원을 중단하거나 세금과 빚으로 메워야 한다. 미래세대를 위한 저축이 미래세대의 빚 부담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최근 반도체 주가의 큰 변동은 낙관에만 기대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처럼 미래 이익에 대한 기대가 빠르게 바뀔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예산을 짜는 정부와 국회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정부와 국회가 주가를 맞힐 수는 없다. 대신 전망이 틀려도 버틸 예산은 만들 수 있다. 내년 법인세가 예산보다 10% 적게 걷히면 부족액은 약 21조 7000억원이다. 그때 지킬 지출과 늦출 사업, 필요한 추가 차입을 지금 따져야 한다.
초과세수의 지속 가능한 부분과 일시적인 부분부터 나눠야 한다. 일시적 초과세수는 법정 정산 등을 고려해 배분 기준을 명확히 하고 그중 50% 이상을 국가채무 상환과 신규 국채발행 축소에 의무 배분하는 재정준칙을 마련해야 한다. 신규 예산사업에는 호황 이후의 재원까지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 올해 돈이 남는다는 이유로 내년 이후의 지출까지 늘려서는 안 된다.
나라 살림의 실력은 돈이 넘칠 때보다 호황이 끝났을 때 드러난다. 미래세대에 남길 유산은 이름 좋은 기금보다 가벼워진 빚과 위기를 견딜 여력이다. 호황의 과실은 우리가 누리고 청구서는 다음 세대에 넘길 수 없다. 늘린 예산을 줄일 수 없다면 일시적인 호황을 믿고 줄일 수 없는 예산부터 늘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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