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의 기본 중의 기본인 민법, 1958년 제정 이후 67년 만에 현대화될 수 있을까. 법무부는 지난달 7일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입법예고했다. 날로 복잡해지는 사회 환경과 경제 현실에 맞춰 가스라이팅 피해자 보호부터 변동형 법정이율 도입까지, 시대에 뒤처진 민법을 전면 수술하는 작업이 첫걸음을 뗀 것이다. 법무부는 40일간의 입법예고를 통해 19일까지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법제처 심사 및 차관·국무회의 등 개정 절차를 진행해 올해 상반기 중 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이데일리는 이 개정 작업에 직접 참여한 김형석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만나 민법 개정의 시급성과 주요 변화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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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교수는 “1958년 민법 제정 당시 대한민국은 농업 사회였고, 경제적으로 발전이 덜 된 상태였다”며 “그 당시 염두에 뒀던 사회상과 지금의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충분히 고려해 민법을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번 민법 개정 작업에서 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023년 8월부터 약 1년간 2주마다 기초위원들이 모여 예비초안을 준비했고, 검토위원회의 면밀한 검토와 전체위원회의 심의·자문을 거쳐 개정안이 만들어졌다. 이번 작업은 앞서 2004년과 2014년 두 차례 시도됐던 민법 개정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후반부터 민법 개정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 결과물이었던 2004년 개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고, 2013~2014년 개정안도 일부만 통과되는 데 그쳤다. 김 교수는 “그 사이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은 모두 대대적인 민법 개정을 이뤘다”며 “처음에 우리가 개정 작업을 시작했을 때 일본 학자들이 한국을 찾아와 우리 작업을 참고하기도 했는데, 결국 그들이 먼저 끝내고 우리는 아직도 진행 중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법정이율, 시대에 따라 높았다 낮았다…이제는 변동제로
개정안 중 일반 국민에게 가장 와닿을 부분으로 김 교수는 ‘변동형 법정이율제 도입’을 꼽았다. 현행 민법에서는 법정이율을 연 5%로 고정해 놓았는데, 경제 상황 변화로 인해 오히려 불합리한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자신이 1990년대 대학을 다닐 당시 정기적금 이자가 20%였던 상황을 언급하며 교과서에 나와있는 ‘5%’라는 법정이율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5% 이자를 주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돈을 맡겨야 할 정도로 높은 이율이 됐다”고 말하며 시대에 따른 상황 변화를 지적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저금리 시대에는 이런 고정이율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채권자가 소송에서 이길 것 같으면 일부러 시간을 끄는 듯한 모습도 나타났다. 소송촉진법상 지연이자를 포함해 시중 이자보다 훨씬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경제 상황에 맞춰 변동 가능한 법정이율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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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간섭에 의한 의사표시 취소’ 조항도 현대 사회의 필요를 반영한 중요한 변화다. 이른바 ‘가스라이팅’처럼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이뤄진 계약을 취소할 수 있게 하는 조항이다.
기존 민법에도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도록 되어있지만, 김 교수는 “실제로 힘이 있는 사람은 겁을 주지 않고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짚었다. 예를 들어 종교 지도자와 신도, 간병인과 환자 같은 관계에서는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영향을 받아 계약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목격된다.
김 교수는 이러한 ‘부당위압(undue influence)’ 법리가 영미법에서는 오래전부터 인정됐지만, 대륙법 국가들에서는 최근에야 받아들이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번 민법개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우리도 받아들일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 대부분 위원이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코로나19 같은 상황, 이제 계약 수정 가능하게
김 교수는 기존 판례는 사정 변경으로 인한 계약 해제나 해지는 인정했지만, 이번에는 수정 가능성까지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를 들어 코로나19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임대료를 매출 기준으로 정했다면 그 기간에는 매출이 줄어든 상황에 맞게 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번 개정안은 단순히 외국의 선례를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았다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됐고, 법조계와 학계의 역량도 많이 성장했다”며 “이제는 외국 법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 흐름을 참고하되 우리만의 경험과 특성을 반영한 개정이 가능해졌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예를 들어 물건에 하자가 있을 때 구제수단에서 독일과 일본은 먼저 하자 보수를 요구한 후에만 대금 감액을 청구할 수 있게 하지만, 한국은 더 간편하게 바로 대금 감액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김 교수는 “우리 사회 실정에 맞게 더 간편하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조정한 예”라며 “이는 우리의 독자적인 입법적 고려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법 개정 이제 시작…국민 관심과 지지 필요”
이번 계약법 분야 개정에 이어 앞으로 담보법, 시효, 물건 변동 등의 개정도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다만 이같은 민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김 교수는 “우리 사회도 많이 바뀌었고, 새로운 사회에 맞는 민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번 개정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국민 모두가 민법을 통해 권리를 실현하고 분쟁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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