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셰프가 냉장고 앞에 섰는데 문이 모두 잠겨 있다고 상상해 보자. 신선한 재료는 분명 안에 가득한데 열쇠가 기관마다 병원마다 회사마다 제각각이라 아무도 열지 못한다. 심지어 어떠한 재료가 있는지 몰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는 추측으로 진행해야 한다. 지금 우리 인공지능(AI) 신약개발에 필요한 바이오데이터의 처지가 꼭 이렇다. AI는 데이터를 먹고 성장한다. 약이 될 후보물질을 설계하고 사람에게 쓰기 전에 독성과 효과를 예측하려면 방대한 실험·비임상·임상, 인체유래물 데이터가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병원의 임상기록, 인체유래물, 제약사의 ADMET(약물의 흡수·분포·대사·배설·독성) 실험 데이터를 세계적 수준으로 쌓아 왔다.
문제는 이 데이터들이 서로 만나지 못한 채 각자의 사일로(silo·곡물창고)에 갇혀 정작 함께 활용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특히 아쉬운 것은 실패의 기록이다. 어떤 물질이 독성 때문에 실패했는지를 담은 데이터는 신약개발이라는 지도에서 막다른 길 표지판과 같다. 이 표지판을 나누지 않으면 모두가 같은 낭떠러지로 다시 떨어진다. 그런데 지금은 개인정보 보호, 민감정보 이슈, 기업 영업비밀 등 복잡한 심의 절차라는 벽에 막혀 각자의 실패가 각자의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다. 게다가 신약개발은 한 번의 도약이 아니라 여러 단계를 잇는 이어달리기다.
유망한 표적을 찾는 발굴 단계에서는 유전체·전사체·단백체를 아우르는 멀티모달 데이터와 정상세포 지도가 후보물질을 다듬는 설계 단계에서는 단백질 구조와 항체·RNA 데이터가 필요하다. 사람에게 쓰기 전 안전성을 가늠하는 비임상 단계에서는 ADMET·독성 데이터가, 마지막 임상 연계 단계에서는 인체유래물과 임상·의료 데이터가 차례로 바통을 넘겨받는다.
K-문샷이 그리는 AI 신약개발은 이 바통이 한 번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음 주자에게 이어질 때 비로소 완주할 수 있다. 어느 한 단계에서 데이터의 흐름이 끊기면 앞 단계에서 AI가 아무리 속도를 내도 전체 기록은 그 지점에서 멈춰 서고 만다. 이미 정부는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 한국인 디지털 분자지도 같은 대형 사업으로 각 단계의 재료를 부지런히 채워 넣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재료를 사 모아도 냉장고마다 잠금장치가 다르면 한 상에 올릴 수 없다. 재료를 더 사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흩어진 냉장고를 하나의 주방으로 잇는 제도의 열쇠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바이오데이터 활용 및 인공지능바이오 연구개발 촉진에 관한 법률안에는 바로 이 잠긴 냉장고 문을 열기 위한 노력이 담겨 있다. 흩어진 바이오데이터를 잇는 국가바이오데이터통합시스템을 세우고 안전하게 분석할 수 있는 국가바이오데이터센터를 두며 가명 처리한 데이터는 연구에 쓸 수 있게 길을 터 준다. 여러 기관을 오가야 했던 생명윤리 심의도 하나로 묶고 개인이 자기 바이오데이터를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는 전송요구권도 담았다.
핵심은 규제 완화가 아니라 규제 합리화다. 개인의 정보는 가명 처리와 비식별화, 폐쇄망 보안으로 더 두텁게 지키되 공익적 연구에는 데이터가 흐르게 하자는 것이다. 안전과 활용은 맞바꾸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두 축이다. 특히 AI를 통한 신약개발에서 안전한 바이오데이터 활용 촉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2035년까지 신약개발 발굴 단계의 속도를 10배까지 끌어올리겠다는 K-문샷의 목표를 세웠다. 그 성패는 결국 각 단계의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고 안전하게 이어 붙이느냐에 달려 있고 그 연결 고리를 제도로 완성하는 일이 바로 이 법률안이다.
아무리 뛰어난 AI 셰프가 있어도 냉장고가 잠겨 있으면 요리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이 법은 그 문을 여는 열쇠이자 K-신약이라는 밥상을 차리기 위한 첫 번째 준비다. 신약개발은 속도가 곧 경쟁력인 분야다. 주요국이 앞다투어 바이오데이터를 국가 자산으로 묶어 AI에 먹이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국회의 조속한 통과를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고]냉장고를 부탁해야 ‘K-신약’이 열린다](https://image.edaily.co.kr/images/photo/files/NP/S/2026/09/PS26091800103.jpg)


![젠슨 황 엔비디아 칩 판매 2배…주가 불기둥 [뉴스새벽배송]](https://image.edaily.co.kr/images/vision/files/NP/S/2026/09/PS26091800323t.jpg)
![“연임 안한다·재판 받겠다” 李대통령 둘 다 말할까 [오늘의 여의도]](https://image.edaily.co.kr/images/vision/files/NP/S/2026/09/PS26091800206t.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