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정주영 ‘아치’서 정의선 ‘아고라’로…현대차 사옥에 새긴 43년 기업가정신

이 기사 AI가 핵심만 딱!
애니메이션 이미지
김형욱 기자I 2026.09.17 05:00:03

Google 검색에서 이데일리 기사를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사옥에는 스토리가 있다] 현대차그룹
아치에 담은 정주영의 실용,
글로벌 확장 향한 정몽구의 105층 꿈
사람·로봇 잇는 정의선의 아고라
국내서 세계로, 자동차서 로봇으로
건물은 달라도 기둥은 '도전'이었다

2026년 3월 리뉴얼을 마친 현대차그룹 서울 양재사옥 전경. 2000년 현대차·기아가 이곳에 함께 둥지를 튼 이후 양재사옥은 20년 넘게 그룹의 경영 거점 역할을 해왔다. 사진=현대차그룹
2026년 3월 리뉴얼을 마친 현대차그룹 서울 양재사옥 전경. 2000년 현대차·기아가 이곳에 함께 둥지를 튼 이후 양재사옥은 20년 넘게 그룹의 경영 거점 역할을 해왔다. 사진=현대차그룹


[이데일리 김형욱 기자] 현대그룹을 설립한 아산 정주영 창업주는 회사 건물의 겉모습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데 돈을 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일하는 곳은 실용적이면 된다’는 그의 생각은 계동사옥을 비롯한 현대 계열 건물에 반복된 아치형 외관으로 남았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달랐다. 현대차의 위상을 서울 한복판 105층 초고층 건물로 보여주려 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사옥에 던진 질문은 또 달라졌다. 그의 초점은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고 일할 것인가’에 맞춰졌다.

정 회장의 의중을 담아 올 3월 새롭게 문을 연 서울 양재사옥 로비에선 직원들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한다. 책이 놓인 실내정원의 조용한 자리를 찾아 일하고, 푹신한 대형 쿠션에 기대 생각에 빠진다. 그 사이로 커피를 나르고 로비를 순찰하는 로봇이 오간다.

리뉴얼 디자인을 맡은 글로벌 건축기업 ‘스튜디오스 아키텍처’의 알렉산드라 빌레가스 산느 디자인 디렉터는 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물리적인 공간만 다시 설계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정 회장과 의견을 나누면서 사옥이 조직문화의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변화를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유승민 현대차그룹 스페이스디자인실 매니저는 “단순한 환경 개선을 넘어 임직원이 일하고 생각하는 방식을 그룹의 비전에 맞춰 변화시키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리뉴얼 전인 2020년 5월 현대차그룹 양재사옥 로비. 차량과 미래 모빌리티 관련 전시물이 공간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진=현대차그룹)
리뉴얼 전인 2020년 5월 현대차그룹 양재사옥 로비. 차량과 미래 모빌리티 관련 전시물이 공간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진=현대차그룹)
1년 11개월의 리뉴얼을 거쳐 2026년 3월 다시 문을 연 현대차그룹 양재사옥 로비. 기존 벽을 걷어내고 자연광과 조경, 휴식·업무 공간을 연결해 임직원이 머물고 교류하는 공간으로 바꿨다. (사진=현대차그룹)
1년 11개월의 리뉴얼을 거쳐 2026년 3월 다시 문을 연 현대차그룹 양재사옥 로비. 기존 벽을 걷어내고 자연광과 조경, 휴식·업무 공간을 연결해 임직원이 머물고 교류하는 공간으로 바꿨다. (사진=현대차그룹)
◇정주영의 ‘실용’…화려함 대신 ‘정주영표 아치’

43년 전인 1983년 서울 종로구 옛 휘문고 부지에 들어선 현대그룹 계동사옥은 고도성장기 현대의 심장부였다. 건설·자동차·중공업 등 핵심 계열사와 경영진이 이곳으로 모였다.

정주영 창업주가 사옥을 바라보는 시선은 겉치레보다 실용이었다. 오랜 기간 설계 실무를 해온 이광환 건축법규원장은 “건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현대 건물에 반복되던 아치 형태를 ‘정주영 스타일’이라고 불렀다”며 “당시에는 외관에 과도한 비용을 들이기보다 실용적이면 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했다. 계동사옥뿐 아니라 서울아산병원을 비롯한 당시 현대 계열 건물 상당수에 비슷한 아치가 반복됐다.

율곡로 쪽에 지금도 일부 남아 있는 담장의 흔적 역시 당시 시대상을 보여준다. 지금처럼 사옥과 외부 공간을 연결하려 하기보다 회사의 영역과 도시를 명확히 구분하는 게 당연했던 때다.

한 전직 현대그룹 계열 기업 임원은 “‘왕회장’(정주영 창업주)은 계동사옥 집무실에만 앉아 결재를 받지 않았다. 임원들이 왕회장의 아침 출근길에 사옥 입구에서 긴급 현안을 보고하고 구두 승인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며 “사옥 로비, 구내식당, 엘리베이터 앞 등에서 불쑥 직원들과 마주쳐 대화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정 창업주는 자주 구내 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정주영 시대 현대에 요구됐던 기업가정신은 이와 닮았다. 없는 시장을 개척하고 부족한 자원으로 공장과 배를 만들며 ‘일단 해내는 것’ 자체가 경쟁력이던 시대였다. 사옥 역시 기업의 힘을 장식으로 과시하기보다 사람이 모여 일하고 실행하는 공간이면 됐다.

1983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현대차그룹 계동 사옥. 현재 현대건설 본사를 비롯한 계열사 업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사진=현대건설)
1983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현대차그룹 계동 사옥. 현재 현대건설 본사를 비롯한 계열사 업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사진=현대건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서울 계동사옥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다. 그는 집무실뿐 아니라 출근길과 로비, 구내식당 등에서도 임직원의 보고를 받고 현안을 논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현대건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서울 계동사옥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다. 그는 집무실뿐 아니라 출근길과 로비, 구내식당 등에서도 임직원의 보고를 받고 현안을 논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현대건설)
◇정몽구의 ‘도전정신’ 반영한 105층 GBC의 꿈

정몽구 명예회장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현대차가 사옥에 던지는 질문도 달라졌다. 1990년대 현대차는 기아를 인수하고 세계시장 공략을 확대하며 독립 자동차그룹의 모습을 갖춰갔다. 더 이상 계동사옥 안에 머물 수 없었다.

2000년 정몽구 명예회장이 자동차 경영을 맡은 뒤에는 하루빨리 별도 거점을 마련하는 게 먼저였다. 농협이 지은 양재동 건물을 사들여 2000년 말 현대차·기아가 입주한 것은 이런 현실적인 필요에서 나왔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의 사옥에 대한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결국 2014년 서울 삼성동 옛 한국전력 본사 부지에 당시 감정가의 세 배가 넘는 10조5500억원을 써내며 현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GBC) 계획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구상의 중심에는 105층짜리 초고층 타워가 있었다. 정주영 시대에는 ‘어떻게 하면 없는 것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글로벌 완성차그룹을 일군 정몽구 시대에는 ‘세계 최고와 경쟁하려면 어떻게 존재감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해진 것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2015년 서울 양재사옥의 구 그랜드홀에서 시무식하고 있다. (사진=현대차그룹)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2015년 서울 양재사옥의 구 그랜드홀에서 시무식하고 있다. (사진=현대차그룹)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가운데)이 지난 2016년 김용환 당시 현대차 부회장(왼쪽) 및 정수현 현대건설 사장과 함께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부지를 찾아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사진=현대차그룹)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가운데)이 지난 2016년 김용환 당시 현대차 부회장(왼쪽) 및 정수현 현대건설 사장과 함께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부지를 찾아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사진=현대차그룹)
◇정의선의 또 다른 질문 ‘어떻게 일할까’

현대차그룹의 기업가정신은 정의선 회장 시대에 들어 또 다른 전환점을 맞는다.

정 회장은 지난 5월 리뉴얼된 양재사옥 타운홀에서 “사람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원이 건물에 눌리는 느낌을 받기보다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고 어디서든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현대차그룹이 1년11개월에 걸쳐 지하 1층~지상 4층 약 3만 6000㎡의 양재 사옥을 대대적으로 리뉴얼한 배경이다.

빌레가스 산느 디렉터는 정 회장과의 이야기 중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이 만나 의견을 나누던 광장인 아고라(agora)를 떠올렸다. 중앙 홀 양쪽의 높은 벽을 걷어내고 천장을 높였다. 끊겨 있던 위아래·좌우 공간을 이어 다른 곳에 있는 직원끼리도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주치도록 했다.

정 회장은 이 과정에서 사내 도서관을 꾸밀 때는 자신이 평소 자주 찾던 일본 츠타야서점의 운영사 CCC를 기획 협력사로 추천하기도 했다. 책만 파는 곳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제안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회의실에서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의선 시대 사옥의 변화는 이뿐 아니다. 새 양재사옥에서는 배송 로봇이 물건을 나르고, 사족보행 로봇이 공간을 오간다. 현대차는 완성된 건물에 로봇을 갖다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처음부터 로봇도 건물을 사용하는 구성원으로 보고 설계했다.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이 엔진과 기계공학만으로 결정되던 시대에서 AI·소프트웨어·로보틱스로 확장되는 흐름이 건물 안에도 먼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빌레가스 산느 디렉터는 “로봇 전용 엘리베이터와 이동경로를 만들기 위해 바닥 높이 차이와 방향을 돌 때 필요한 공간, 충전시설 위치까지 건축설계 단계부터 검토했다”고 말했다.

양재사옥 로비를 순찰하는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사족보행 로봇 ‘스팟’. 리뉴얼된 양재사옥에는 로봇의 이동을 고려한 동선과 전용 엘리베이터가 마련됐다. (사진=현대차그룹)
양재사옥 로비를 순찰하는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사족보행 로봇 ‘스팟’. 리뉴얼된 양재사옥에는 로봇의 이동을 고려한 동선과 전용 엘리베이터가 마련됐다. (사진=현대차그룹)


이는 GBC 구상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정 명예회장이 구상했던 GBC는 그룹 주요 기능을 하나의 압도적인 초고층 본사에 집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2031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 중인 현 계획은 최고 242m·49층짜리 타워 3개동으로 바뀌었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초고층 빌딩을 세우겠다는 계획이 사라진 대신 중앙에 대규모 도심숲을 만들고 전망공간과 전시장·공연장 등을 영동대로 전면에 배치한다는 새 계획이 세워졌다.

현대차그룹은 이와 함께 약 8조원을 투자하는 복정역 인근 미래 연구·업무 거점 ‘HMG퓨처콤플렉스’를 건설 중이다. AI와 소프트웨어 중심의 미래 연구조직을 위한 공간으로 2030년 말 완공을 목표로 한다.

이광환 원장은 “부지는 정몽구 명예회장이 마련했지만 그 위에는 정몽구 회장 스타일의 설계와 정의선 회장 스타일의 설계, 두 가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현대차 사옥의 43년은 ‘차세대 기업 조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해법을 찾는 과정이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왼쪽)과 알렉산드라 빌레가스 산느 스튜디오스 아키텍처 디자인 디렉터가 지난 5월 14일 서울 양재사옥에서 열린 ‘로비 스토리 타운홀’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현대차그룹)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왼쪽)과 알렉산드라 빌레가스 산느 스튜디오스 아키텍처 디자인 디렉터가 지난 5월 14일 서울 양재사옥에서 열린 ‘로비 스토리 타운홀’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현대차그룹)


이 기사 AI가 핵심만 딱!
애니메이션 이미지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