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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여사는 최재형이 지난 1920년 일제의 총살로 순국한 이후 1952년에 작고했다. 최 여사의 유골은 70여 년 동안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의 수도 비슈케크 공동묘지에 방치돼 있다가 수년 전 최재형사업회가 그 존재를 파악했다. 이후 최재형사업회는 국가보훈부와 함께 최 여사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묘역 108번에 합장하기로 했다. 독립운동가묘역 108번은 최재형의 묘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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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숙 최재형사업회 이사장은 “최재형을 도와 평생을 내조하고 아들과 사위까지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 단지 서훈이 없다는 이유로 유골을 모셔오는 모든 비용을 민간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서경덕 교수도 “어려운 상황을 전해듣고 누리꾼과 함께 모금을 통해 최 여사를 모셔 온다면 오히려 더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모금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한편, 최재형은 1858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나 13살이 되던 해 가출해 러시아 선원에 구해져 러시아 함대 견습수부가 됐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최재형은 러일전쟁에서 군수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고, 을사늑약 체결로 조선의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연해주 남부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등 투쟁에 나섰다.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운동을 위해 썼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계획에도 참여했으며, 거사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손을 썼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자,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이후 최재형은 1920년 러시아의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최재형의 유골은 아직 찾지 못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