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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16일 영국 런던에 모인 37개국 대표가 채택한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헌장 서문의 일부다. 20세기 전반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뒤 연합국을 비롯한 각국은 안전보장이사회와 경제사회이사회 등을 거느린 유엔(국제연합)을 창설하면서도 유네스코 발족을 서둘렀다. 교육·과학·문화 분야의 국제협력으로 무지와 불신을 극복하고 상호 이해를 통해 지속 가능한 평화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유네스코 선언은 구호에 그쳤다. 한반도, 동남아시아, 인도 북부,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등에서는 뿌리 깊은 종교·민족·이념 갈등에다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뿌려 놓은 분쟁의 씨앗까지 겹쳐 연일 포성이 진동하고 화염이 치솟았다.
유고슬라비아연방이 해체된 뒤 1992년부터 3년 넘게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인 보스니아전쟁은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지·반목·증오로 뭉쳐진 화약과 폭탄은 곳곳에 깔렸으며 유럽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1995년 10월 25일부터 23일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에 모여 제28차 총회를 연 유네스코 회원국 대표들은 마지막 날 뜻깊은 결정을 내렸다. ‘관용의 원칙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며 이날을 ‘국제 관용의 날’로 제정한 것이다. 11월 16일은 유네스코 창립 50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유엔은 이 결정을 즉각 승인했다.
유네스코가 천명한 관용의 원칙을 읽어보면 오늘날 인류에게 관용이 얼마나 절실한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관용을 증진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명확히 알 수 있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관용은 문화 다양성을 존중하고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지식, 개방, 커뮤니케이션, 사상의 자유에 의해 증진된다. 양보나 시혜와는 다르며 다른 이의 인권과 자유를 인정하는 적극적 태도다. 불의를 용인하거나 자기 확신을 포기하라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견해가 다른 사람에게 강요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유네스코는 회원국에 이를 위한 제도적·행정적 조처를 하라고 촉구했다. 가족과 학교를 비롯한 공동체에도 관용 교육을 강력히 권고했다.
20년이 지난 뒤 ‘똘레랑스(관용)의 나라’로 불리는 프랑스에서 지식인들을 당혹감에 휩싸이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주간신문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를 풍자하는 만평을 실었다가 2015년 1월 7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난사한 총에 맞아 직원들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이 사건은 종교적 가치와 표현의 자유 등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한 인물을 소환했다. 관용의 가치를 역설한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다.
신·구교 갈등 속에서 누명을 쓰고 처형된 상인의 복권을 요구하며 1763년 그가 펴낸 ‘관용론’은 에브도 총격 사건 직후 250여 년 만에 프랑스 베스트셀러 순위에 다시 올랐다.
볼테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국 등의 사례를 들며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는 모두 약함과 과오로 만들어져 있다”면서 “서로 용서하는 것이 자연의 제1법칙”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박해하는 행동이 성스러운 것이라면 이교도를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천국에서 최고 성인이 될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볼테르의 명언으로 흔히 알려진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권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에벌린 홀이 1906년 평전 ‘볼테르의 친구들’에 쓴 문구다. 파리고등법원이 급진적 내용을 담은 엘베시우스의 책을 금서 처분하자 볼테르가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무슬림의 에브도 테러는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박해한 전형적인 비관용 행위다. 대부분 프랑스 독자도 에브도의 말할 권리를 옹호하는 볼테르의 심정으로 ‘관용론’을 구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브도의 편집자와 필진도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적 태도를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슬림은 무함마드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는데, 이에 대해 무지했거나 이를 알면서도 무시한 것이다.
볼테르의 호소와 유네스코의 촉구에도 오늘날 세계는 배타와 혐오로 가득 차 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는 증오와 억압이 저항과 보복을 부르고, 그것이 다시 응징과 원한을 낳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 무대나 시위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견해나 지지 정당이 다른 상대방을 이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없애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긍정과 포용의 언어는 찾기 어렵고 저급한 조롱과 서슬 퍼런 흠집 내기와 섬뜩한 저주가 난무한다.
관용이 없는 사회에서는 약자가 먼저 당할 수밖에 없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고, 혐오와 배타의 대상도 이주민·빈민·장애인·동성애자 등 소수자에 집중된다. 그러나 상대를 괴물로 만들면 나도 괴물이 되고, 적을 악마화하면 자신도 악마가 될 수밖에 없다. 관용은 남을 위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하는 길이다.
미국의 사상가 로버트 그린 잉거솔은 “관용은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공자 어록이나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 잠언과 다르지 않다. 관용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글=이희용 다문화동포팀 자문위원(전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