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놀이' 장르 탄생 시킨 거장… 무대장치보다 배우 숨결에 집중

이윤정 기자I 2026.02.02 06:00:00

[공연계 연출열전]②손진책
극단 미추 창단…절제미 선사
''벽속의 요정'' 1인 32역 확장
''마당놀이'' 250만 관객 모아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손진책(79)은 한국 연극사의 큰 줄기를 바꿔온 거장이자, 공연계의 살아있는 역사다. 그의 연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한국 공연예술이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는 일과 같다. 그는 1981년 MBC 창사 20주년 기념 공연으로 ‘허생전’을 무대에 올리며 ‘마당놀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해학과 소통을 중심에 둔 마당놀이 형식은 한국 현대 연극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이후 1986년 극단 미추를 창단하며, 마당놀이의 정신을 무대에 정착시켰다.

손진책 연출 세계의 핵심은 ‘절제와 비움의 미학’이다. 화려한 무대 장치를 과감히 덜어내고, 배우의 숨결에 집중하며 연극이 가진 본질을 극대화한다. 김건표 연극평론가(대경대 연기예술과 교수)는 “손진책 연출은 우리 연극의 원형을 무대 언어로 복원하고, 이를 확장하기 위한 실험을 지속해왔다”며 “완성도 높은 미학적 무대를 꾸준히 구축해 왔다”고 평했다.

손진책 연출가(사진=뉴스1).
완성도를 향한 거장의 집념

초기작 ‘한네의 승천’(1975)은 손진책이라는 이름을 연극계에 본격적으로 알린 대표작이다. 이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신인 연출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주목받는 연출가로 떠올랐다.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위해 선녀담에 몸을 던져 승천하는 한네의 슬프고 몽환적인 삶을 농악·탈춤·줄타기 등 전통 연희로 풀어낸 작품이다. 서구식 연극 문법이 주류였던 당시 공연계에 한국적 샤머니즘, 장단, 몸의 움직임으로 서사를 풀어내며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손진책은 이 작품을 통해 김성녀(한네 역)와 인연을 맺어 이듬해 결혼했다. 그의 예술뿐 아니라 삶의 방향까지 바꾼 작품인 셈이다.

‘오장군의 발톱’(1988)은 손진책의 ‘비움의 미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군대에 간 순박한 청년 오장군이 전쟁의 소모품으로 전락해가는 비극적 과정을 해학과 풍자를 섞어 그려냈다. 거창한 전쟁 세트 대신 정제된 무대와 상징적인 소품만을 활용해 오히려 관객이 전쟁의 참혹함과 인물의 고독에 깊이 몰입하게 만들었다.

연극 ‘벽속의 요정’(사진=명동예술극장).
‘벽속의 요정’(2005)은 독보적 페르소나(연출세계를 대변하는 배우)인 김성녀가 1인 32역을 오가며, 1인극의 한계를 확장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스페인 내전 당시 30년 동안 벽 속에 몸을 숨기고 살아간 아버지와 딸의 실화를 토대로 했다. 비극의 서사를 절제된 연출과 다층적인 인물 변주로 풀어낸 것이 특징이다. 그림자 놀이와 소리, 정교한 동선만으로 빈 무대를 집과 거리로 바꾸며 관객의 상상력을 극대화했다.

그의 연출 인생에서 마당놀이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허생전’을 시작으로 ‘옹고집전’ ‘심청전’ ‘춘향전’ ‘변강쇠전’ 등을 선보이며 연극과 축제의 경계를 허문 장르로 자리 잡았다. 마당놀이 시리즈는 25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연극상, 대한민국연극대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최근 공연을 마친 ‘홍길동이 온다’에 이르기까지 관객과 호흡하는 그의 무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발 디딘 세상이 마당이고, 인생은 한바탕 놀이”라는 그의 말에는 삶을 무대로 바라보는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무엇보다 작품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연출가로 알려져있다. 가장 가까이에서 작품의 절반을 함께해 온 김성녀는 “공연 기간이 두 달이든 세 달이든 모든 회차를 직접 관람하며 배우들에게 끊임없이 메모를 건네는데, 그런 연출가는 대한민국에 없다”면서 “공연의 완성도를 향한 그 집념이 지금의 연출가 손진책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마당놀이 ‘홍길동이 온다’(사진=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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