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주민대책위 “남겠다는 20여명 빼고 모두 떠나겠다”

경향닷컴 기자I 2010.11.26 10:12:32

‘유령섬’으로 변해가는 연평도 르포

필요한 물건 챙겨 다시 뭍으로… 북한군의 포탄을 피해 연평도를 급하게 떠났던 주민들이 25일 자신이 살던 집에 돌아가 옷과 세간 등을 챙겨 인천행 배에 다시 몸을 싣고 있다.

 
[경향닷컴 제공] 25일 오후 5시. 마지막 인천행 여객선이 연평도 선착장을 떠났다. 어스름이 내리면서 마을의 가로등엔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끊어졌던 전기가 어제 오전 복구된 덕분이다. 그러나 가정집의 불은 좀처럼 켜지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만 깨진 유리창 너머 집안으로 스며들었다. 포탄에 움푹 팬 골목길이 불빛에 드러났다. 이따금 개가 짖었다. 연평도 820여가구는 하루아침에 빈집들로 변했다. 주민등록상 인구 1756명, 실제 거주자만 1400여명이던 마을엔 채 20여명이 남지 않았다. 북한의 포탄 공격으로부터 사흘째. 연평도는 ‘유령의 섬’이 됐다.

“꼭 남겠다는 사람 외엔 모두 떠날 것”

이날 오전 8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주민 5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포격을 피해 이웃들이 섬을 떠날 때에도 남아 있던 이들이었지만, 더 이상은 어렵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최성일 ‘연평주민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47)은 “날씨는 추워지고 집도 파손돼 더 살 수가 없다. 꼭 남아야겠다는 사람들만 빼고 모두 떠날 것”이라고 밝혔다. 집이 부서져 당장 머물 곳도 마땅치 않은데다, 구호물품으로 사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주민 대부분이 섬을 떠났다. 포격이 발생한 23일 어선 19척으로 394명이, 여객선으로 130명이 빠져나갔다. 이튿날엔 해경정, 해군 공기부양정, 어선, 행정선 등 가능한 모든 배를 동원해 탈출 러시가 이어졌다. 사흘째인 이날 낮 인천에 대피해 있던 주민 220여명이 2편의 여객선으로 돌아왔지만, 귀중품과 옷가지를 챙긴 뒤 썰물처럼 다시 섬을 빠져나갔다. 연평도엔 공무원, 복구 지원팀, 자원봉사자 등 100여명과 취재진만 남았다.

옷가지 챙기러 ‘다녀가는’ 주민들

같은 날 오후 인천발 연평도행 여객선 코리아익스프레스 호. 주민들은 배 안의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뉴스 화면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반쯤 무너지고, 불에 그을린 연평도의 모습이 자꾸만 화면에 비쳤다. 주민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잿더미가 된 집으로 ‘다니러 가는 길’이었다.

“귀중품 챙겨서 오후 배로 다시 나올 거예요. 집사람이랑 애들은 무서워서 (연평도로) 못 가겠다고 하고….” 꽃게잡이배 선장 신현근씨(43)는 포격이 시작된 23일 낮잠을 자다 포탄 소리에 놀라 깼다. 나와 보니 속옷 차림이었다. 다시 옷을 챙겨 입고 인천으로 대피했다. 아직 집이 부서졌는지 어떤지도 모르는 상태다.

이모씨(44·여)도 마찬가지였다. 현관문만 간신히 잠그고, 입은 옷 그대로 대피소로 향했다. 하룻밤을 뜬눈으로 보낸 그는 이튿날 아침 인천행 배에 몸을 실었다. 연평도로 돌아가지만, 생필품만 챙겨서 인천으로 다시 나올 생각이다. 고3 아들이 있다는 그는 “당분간 찜질방에서 애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 게 가장 걱정”이라고 말했다.

낮 12시30분과 오후 1시, 2편의 여객선이 30분 간격으로 인천 항동 연안여객터미널을 떠나 연평도로 향했다. 322석 정원의 첫 배 승선표가 일찌감치 매진되는 바람에 여객선 한 척을 더 투입한 터였다. 첫 배는 승객의 3분의 1인 140명이 연평도 주민이었다. 몸만 간신히 빠져나왔던 주민들은 인천항 근처의 찜질방과 친척집에서 뜬눈으로 하룻밤, 이틀밤을 보냈다. 주민과 취재진, 구호 물품과 방송 카메라 같은 취재 장비로 배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 서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착잡한 표정의 주민들은 아는 얼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앉아 불안감을 털어놨다. 이인수씨(58)는 “다들 통장이나 귀중품도 들고 오지 못했다”며 “폭격으로 유리창이 깨졌는데 도둑이라도 들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주민들은 서해상에서 한·미 연합훈련이 진행되는 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를 ‘고비’로 보고 있다. 적어도 그때는 넘겨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일단 짐을 챙긴 뒤, 오후 배로 다시 나올 생각들이다. 

주인 없는 구호물품만 덩그러니

출발 예정인 오후 5시를 넘겼지만 선착장엔 “속히 탑승하시길 바란다”는 방송이 울려펴지고 있었다. 인천에서 연평도까지 뱃길로 3시간. 연평도에서 주어진 1시간30분은 짧았다. 자동차와 트럭, 트럭 짐칸에까지 올라타고 마을로 흩어졌던 주민들은 부리나케 다시 선착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번엔 옆구리마다 가방을 끼고, 노끈으로 단단히 묶은 상자를 짊어졌다. 이번 ‘엑소더스’가 얼마나 길어질지 주민들은 아직 모른다.

돌아와 보니 집 오른쪽 절반이 폭삭 주저앉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김영남씨(25). 황망한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옷가지와 귀중품만 챙겨서 다시 나왔다. 김씨는 “언제 또 포탄이 떨어질지 모르는데 어떻게 여기 있나. 대피소가 너무 열악해 잘 수도 없다. 다시 육지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김병호씨(65)도 옮겨지지 않는 걸음을 떼 배로 향했다. 수리를 해서라도 섬에 머물 생각이었는데, 깨진 유리창 때문에 집 안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다. 26일과 27일엔 파도가 높다고 했다. 지금이 아니면 섬을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예정 시간보다 16분을 넘겨 여객선이 떠났다. 마을엔 적막이 흘렀다. ‘민박’ 간판불이 환하게 켜졌지만, 관광객들은 자취도 없고 취재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불이 켜진 파출소엔 경찰관들이 부서진 집기며 가구를 옮기고 있었다. 포탄이 지나간 흔적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형광등 아래서 한 경찰관이 말했다. “주민들이 여기 남아 있으려고 하지 않아요. 28일 한·미합동훈련이 시작되면 여기가 포격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적막한 마을 뒤 초등학교 건물은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았다. 사실상의 대책본부가 꾸려지면서 공무원, 취재진과 자원봉사자들이 ‘점령’했다. 교실 한구석에는 생수, 라면, 빵 같은 구호물품 수십 상자가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 물품들을 나눠줄 주민은 없는 상태다.

왜 주민들은 섬을 떠났을까. 이날 낮 배에서 만난 박명재씨(70)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그는 한국전쟁 때 피란민으로 내려와 연평도에서 평생을 살았다. “자식들이 불안하다고 이사 오라고 난리지만, 난 여기 살려고 했어. 제2의 고향이니까. 이젠 나갈까 싶어. 연평해전 나고, 이번에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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