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오성·장동건 주연의 영화 ‘친구’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입니다. 언제부턴가 흙수저 청년을 울리는 표현이 됐습니다. 입사지원서에 학력, 직업 등 부모의 스펙을 적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락과는 상관없는 참고사항이라지만 정말 그럴까요? 많은 청년들이 현대판 음서제도라고 여깁니다. 청년실업 해소를 목놓아 외쳤던 여야 국회의원 300명이 개선하자고 나서면 금방 해결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현실은 여전합니다. 오죽하면 군대에서도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를 요구했다는 사실이 국감에서 밝혀졌습니다.
“민생, 민생, 민생….”
여야는 항상 민생을 입에 달고 삽니다. 20대 총선 이후 여소야대 지형의 산물입니다. 구태의연하게 권력게임에 몰두했다가는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입니다. 그러나 허언입니다. 여야의 최대 관심사는 권력게임입니다. 국감에서 드러났듯이 민생은 그저 장식품입니다. ‘부모의 스펙 기재 금지’라는 청년의 소박한 희망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야의 대권놀음, 조기 후기 예송논쟁과 뭐가 다른가?
조선 후기 예송논쟁(禮訟論爭)이라는 게 있습니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왕권과 신권의 역학 관계가 녹아있다지만 지금 시각으로 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당시 정치세력이었던 서인, 남인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죽고 나서 차남인 효종이 왕위에 오릅니다. 문제는 효종 사후입니다.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의 상복 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격렬하게 대립한 게 1차 예송논쟁입니다.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었던 만큼 1년설을,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해 장자나 다름없기 때문에 3년설을 주장했습니다. 이후 효종의 비가 죽으면서 조대비의 상복 문제를 놓고 2차 예송논쟁이 발생합니다. 쟁점은 역시 효종이 장남이냐 차남이냐였습니다. 서인은 대공설(9개월), 남인은 기년설(1년)을 주장했습니다. 1차 예송논쟁은 서인의 승리, 2차 예송논쟁은 남인의 승리였습니다. 문제는 이 시기 민생은 전염병, 흉년, 대기근으로 참혹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대선을 둘러싼 여야의 다툼은 어찌 보면 조선 후기의 예송논쟁이 맞닿아 있습니다. 민초들의 삶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리그입니다. 여권은 잃어버린 10년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야권 역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인식입니다. 물론 조선시대 예송논쟁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네의 삶과 너무나 유리된 채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생국감 다짐은 반쪽·파행의 진흙탕입니다. 대선의 유불리와 기선제압을 둘러싼 정치게임 속에서 삶과 정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여야 대립이 격렬할수록 민생은 갈수록 망가집니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비쟁점 법안은 좀 처리해가면서 싸울 수는 없을까요? 여야의 정쟁에 모든 것은 올스톱 상태입니다.
◇‘민생은 도대체 어디로’…여야 갈등은 항구적 위헌상황
정치는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게 일차적입니다. 여야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헌법에도 명문화돼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현행 헌법 10조입니다. 민생은 정말 중요합니다. 배부르고 편히 쉴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라진 민생을 메우는 빈 공간은 여야의 파워게임입니다. 어찌보면 여야는 헌법 10조를 항구적으로 위반하고 있습니다.
시급한 민생현안은 한둘이 아닙니다. 청년실업 해소, 일자리 창출, 갑질 철폐, 사교육비 해소, 복지확대 등등. 모든 게 하나같이 중요합니다. 2016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민생은 주거문제가 아닐까요? 서울이든, 지방이든, 강남이건 강북이건 주거 형태가 아파트, 빌라, 단독주택 어느 것이든 사람들은 모두 살 곳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중산층과 서민은 이미 하우스푸어나 렌트푸어가 된지 오래입니다. 모두 은행대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화장실만 내 집이고 나머지는 은행 소유다” “방 한 칸만 내 집이고 나머지는 모두 은행 소유다”는 우스개가 유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집을 공짜로 달라는 게 아닙니다. 소득과 비교할 때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집값은 누가 봐도 문제입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값비싼 주거비용은 2016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만악의 근원입니다. 집값이 너무 비싸서 결혼이 어렵습니다. 어렵게 결혼해도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다보면 아이를 낳은데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월급은 제자리인데 껑충 뛰는 집값에 허리가 휩니다. 맞벌이를 하다가 한 명이 그만두면 나중에는 추가 대출도 발생합니다. 저출산고령화 문제의 핵심은 소득 증가로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주거비의 수직상승입니다. 민생을 외치는 정치권이 가장 큰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런 적이 있나요. 주거난 해소가 여의도 국회의 주요 이슈로 장기간 논의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모든 게 선거 때 반짝입니다. 국회선진화법 존폐 논란, 테러방지법 처리, 공천갈등, 총선 승리, 장관 해임안 처리 등과 관련해서는 적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동안도 난타전을 벌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죠. 여야 정치권이 한 달 이상 대논쟁을 벌여서 대한민국의 주거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나요. 단연코 없습니다.
◇‘정치·언론·국민’ 3각 악순환 구조…다수결 부정과 소수의견 묵살
민생실종은 정치, 언론, 국민이라는 3각 악순환의 괴물이 만들어낸 구조 탓입니다. 또 다수결 원리와 소수 의견 존중이라는 의회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민생을 강조하는 국회의원들은 대선국면에서 정치공방에 주력합니다. 보통 정책은 언론이 잘 보도하지 않는다고 탓합니다. 밤을 새워가며 정책을 개발하기보다는 상대당의 유력 정치인을 거칠게 비난하면 지지층 내부에서 단박에 스타가 됩니다. 한마디로 가성비가 좋습니다. 유권자와 지역구 주민들이 알아볼 정도로 유명세를 탑니다. 재선 고지는 한결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정치·선거보도에서 정책경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언론도 현실은 처참합니다. 대체로 ‘누가 누구를 앞선다’는 경마식 보도입니다. 변명은 간단합니다. 독자들이 정책뉴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유력 대선주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합니다. 독자들의 주목도는 확실히 높습니다. 정책보다 잘 팔리는 정치뉴스를 포기할 마음은 사실 없습니다.
주권자 국민은 늘 정치를 비판합니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여야가 허구한 날 싸운다는 게 요지입니다. 맞습니다. 국회의원들은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혈세를 주는 국민의 비판에도 요지부동입니다. 국민의 힘이 가장 강력해질 때는 선거 기간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표로 응징하면 됩니다. 그러나 함량미달의 국회의원들은 또다시 국민의 선택을 거쳐 여의도에 입성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민생실종은 대결적 정치구조도 한 몫 합니다. 다수당의 일방통행과 소수당의 발목잡기는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우선 선거에서 국민의 지지를 확인한 다수당은 뭘 할 수 없습니다. 소수당이 극력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선거에서 다수당으로 선택받으면 주요 정책을 추진하고 다음 선거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으면 됩니다. 소수당도 할 말이 있습니다. 무조건 힘의 논리를 앞세워 밀어붙이는 다수당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여야의 대결적 공생 구조에는 국회선진화법이라는 괴물(?)도 한 몫 하고 있습니다.
◇고용정책기본법 개정안 통과 가능성과 슬픈 예감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헬조선을 살아가는 흙수저 청년들은 이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19대 국회 시절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용정책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임기만료로 그냥 폐기됐습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근로자를 모집·채용할 때 업무능력과 상관이 없는 근로자 가족의 출신학교, 최종학력, 근무처, 근무처에서의 직위 및 재산사항 등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박병석 의원은 20대 국회에서 같은 법안을 다시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법안이 통과되면 채용과정에서 이러한 질문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이제 취업을 앞둔 청년들이 그만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리야 없겠지만 본인의 불합격이 혹시 풀빵장수 아버지와 청소노동자인 어머니의 탓이라고 자책한다면 너무 가혹한 현실입니다. OECD 국가 중 채용 과정에서 부모의 스펙을 요구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사실상 대한민국이 유일한 나라입니다. 부모 스펙 기재 금지는 청년을 활짝 웃게 만드는 ‘민생’입니다.
정치는 권력놀음에서 벗어나 정책을 연구하고, 언론을 이를 더 크게 보도하고, 국민은 싸움보다 민생을 챙기는 후보와 정당을 선택하는 3각 선순환의 구조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해봅니다. 20대 국회에서 과연 가능할까요. 그런데 왜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을까요.
▶ 관련기사 ◀
☞ [대선 맛보기] ‘文·安 단일화’ 하늘이 두 쪽 나도 불가능?
☞ [대선 맛보기] 때 이른 대선 진검승부…與·野·靑 모두 패자
☞ [대선 맛보기] ‘된다·안된다’ 분출하는 대선 시나리오 총정리
☞ [대선 맛보기] ‘미완의 대기’ 남경필, 봄날은 올까요?
☞ [대선 맛보기] ‘정치고수’ 반기문, 추석밥상 중심에 오르다
☞ [대선 맛보기] ‘반전의 기회 있을까’ 서울시장 박원순의 차기 도전
☞ [대선 맛보기] 반기문 대선 필패론과 도올 김용옥의 천기누설?
☞ [대선 맛보기] 김대중의 4자필승론 ‘악몽’ 되풀이하는 야당의 '오만과 편견'
☞ [대선 맛보기] 추미애 압승과 ‘문재인의 1469만표’
☞ [대선 맛보기] ‘노무현의 왼쪽’ 안희정, 문재인 뛰어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