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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제목이기도 하지만 사실 서거 전 가까운 지인들에게 유언처럼 남긴 말이기도 하다. 이를 현장에서 직접 들은 유시춘(74)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이사장은 “그 말씀을 하시곤 일주일 후에 입원하셨다”며 “그리고 8월에 돌아가셨다. 유언처럼 되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유시춘 이사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41년 전인 1984년이다. ‘전두환 타도’를 외치다 끌려간 학생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생사조차 알 수 없던 때 부모들이 ‘우리 아이들을 살려달라’며 찾아간 곳이 야당 의원의 집이었다.
당시 서울 상도동 김영삼 의원을 찾아가 애원했더니 “뭐라꼬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동교동으로 김대중 의원을 찾아가니 버선발로 나와 손을 잡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라고 공감하며 귀를 기울였다. 전혀 다른 태도에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더 마음이 갔다. 이때부터 시작된 ‘찐 인연’은 그를 국민정치연구회 정책연구실장,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등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은 서거 2년 전 급하게 그를 다시 찾았다. 자신의 자서전 저술을 도와줄 적임자로 여긴 것이다. 그렇게 그는 2006년부터 서거 직전까지 60여 차례 김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나 그의 삶과 정치 여정, 민주화 투쟁에 대한 구술을 기록했고 완성된 초고만 원고지 약 5000매에 달한다. 김 전 대통령의 추가 유언에 대해 묻자 그는 조금 망설였다. “‘1987년 12월 대선 때 YS와 단일화를 하지 않은 게 후회된다. 우리 역사가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었는데…’라는 말씀을 하셨다.”
1987년 12월. 김대중·김영삼 후보는 존경받는 민주화운동 지도자이자 불세출의 카리스마적 정치인이었다. 두 사람 중 누구든지 야권 후보로 출마하면 여당 후보인 노태우를 제칠 상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으며 노태우 후보의 당선이 확정됐다. 최종 득표는 노태우 후보가 전체의 37%인 828만여표, 김영삼 후보가 633만여표, 김대중 후보가 611만여표, 김종필 후보가 182만여표였다.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표를 합치면 55%를 넘었다. 김 전 대통령도 당시 상황을 일평생의 가장 후회되는 일로 꼽은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했다. “살아온 인생이 무난하지 않았음에도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김 전 대통령은 평소에도 그를 아꼈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글솜씨 때문이다. 고려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22세 때 처음 쓴 중편소설 ‘건조지대’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안개 너머 청진항’, ‘우산 셋이 나란히’, ‘6월 민주항쟁’, ‘70 80 민주화운동사-우리 강물이 되어’ 등이 있다. 특히 1994년에는 오늘의 작가로 뽑혔고 ‘6월 민주항쟁’은 청소년권장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화려한 집필이력에 그는 “전직 소설가”라고 정정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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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쉬었다가 1990년대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민주화 운동을 하느라 작품을 쓸 겨를이 없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 계기는.
△동생 (유)시민이가 우리 집에서 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계엄령 시절에 권총이 머리에 겨눠진 채 잡혀갔다. 1984년엔 서울대 프락치사건으로 두 번째 구속됐다. 당시 관악경찰서 수사과장이 잠시 보자고 했다며 집에서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갔는데 그대로 구속됐다. 폭행과는 아무 상관 없이 (서울대) 학생회 부활을 추진하던 지도부를 묶어버린 거다. 너무 기가 막혀서 큰 모조지에 ‘의를 구하는 자는 죄인입니까?’라는 대자보를 써서 서울대에 찾아갔다. 그 대자보를 본 사람 중 20명쯤이 국회의원이 됐다.
-교직에도 있었는데.
△당시 15년차 현직 교사였던 1985년 5월 23일, 김민석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등 70여명이 서울 을지로2가 서울미국문화원에 잠입해 광주 진상 규명과 전두환 정권 퇴진, 미국의 책임 촉구를 외쳤다. 그날 지하실에 갇혔던 ‘광주사태’라는 단어가 햇빛 속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안 되겠더라. 그날을 계기로 그때부터 구속학생 학부모회 총무를 맡아 활동했고 이것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로 이어졌다. 내가 먼저 구속자 가족이 된 셈이다. 1985년 7월 중순, 서소문 서울지법 대법정에서 미문화원 사건 첫 재판이 열렸는데 150명 정도 들어가는 법정에 300명이 넘게 모였다. 몸무게가 45㎏쯤 나갈 때였는데, 허리에 광목을 칭칭 감고 법정에 들어갔고 인재근(故 김근태 의원 배우자)씨가 매직펜을 가지고 들어갔다. 당시에 설난영(김문수 의원 배우자)씨도 함께 있었다. 법정에 앉아서 광목을 찢으며 ‘군사독재 타도하자’는 띠를 만들어 펼쳤다. ‘애국 학생을 역적으로 몰지말라!’는 구호가 터져 나오며 재판은 시위장이 됐고, 결국 재판을 못 했다. 그 길로 동아면세점 앞까지 행진하다가 몽땅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2박 3일 구류를 살았다. 이후 치안본부에서 내가 재직하던 학교로 찾아와 교장 선생님 멱살을 잡고 “빨갱이 년을 처단하라”고 했다더라. 나는 전두환 정권과 싸웠을 뿐 학교나 학생들과는 사이가 좋았다. 교장 선생님께서 “유 선생, 나 좀 살려줘”라고 해서 사직서를 냈지만 파면으로 처리됐다.
-파면되면 연금 등은 제외되지 않나.
△그래서 그 이후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 파면 덕분에 민주화 유공자가 됐다.
-인생의 리즈 시절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가는 2년이 내 인생의 리즈 시절이었다. 남들은 김대중 정부 시절 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일했을 때를 리즈 시절이라 하겠지만, 내가 생각할 땐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위원으로 활동할 때였다. 성명서도 써야 하고 면회도 가야 해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못 자던 시절이다. 짧게나마 감옥도 살았는데 4살, 7살짜리 아이들이 있을 때였다.
‘6.29선언’ 3년 후에 들은 얘기로는 당시 6월 민주항쟁이 들불처럼 타오를 줄은 아무도 예상 못했다고 하더라. 1987년 6월,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라는 구호를 들고 거리로 나온 사람이 36개 도시 500만명이었다. 크거나 작거나 대학이 소재한 곳이었다. 민주주의는 4.19부터, 6.3 사태, 5.18까지 늘 청년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비상계엄 풍문이 돌았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국민이 분출한 저항의 힘이 전두환 정권이 쓸 수 있는 모든 폭력보다 더 컸던 것이다. (전두환정부의) 추가 계엄은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민주화 과정을 몸소 겪었는데.
△우리 민주주의 역사는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이승만 민간 독재, 박정희, 전두환 군부 독재까지 모든 것을 국민의 힘으로 해결했다. 정당이 한 일이 아니라 4.19 혁명은 초·중·고 학생들이 주도했다. ‘피플 파워(People Power)’로 민주주의 역사를 스스로 쓴 거다. 1980년대는 고난의 연대였지만 양심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을 국민이 해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당시 일본 역사학자인 와다 하루키 교수가 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일본 청년은 좋은 집과 좋은 직장, 예쁜 여자 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이 부럽다. 한국은 반드시 민주주의를 성취할 것이고 경제도 크게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꽃인데 야생화가 아니라 온실 속의 화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시들어버린다. 벼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라는 것처럼 한국 민주주의는 갑남을녀 평범한 국민의 보살핌과 눈물과 피로 물들여지는 꽃이다. 이건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초대 인권위 상임위원을 지내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김대중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지만 정부 부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 기구였다. 인권위는 우리 헌법 10조에서 21조 사이의 기본권 침해에 대해 진정할 수 있는 곳이다. 성별, 종교, 인종, 외모, 학력 등 19가지 이유로 차별을 금지하도록 했다. 3년간 2만건의 진정이 들어왔고 절반이 검찰을 향한 것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2001년 10월, 새벽부터 떨며 문이 열리길 기다리던 김용익 당시 서울대 의대 교수였다. 장애인 차별 진정을 1호로 넣었는데 그분 덕분에 장애인 교육과 기본권 차별이 많이 해소됐다. 당시 미혼여성에게 임신, 결혼 시 해고한다는 서약을 받았던 대기업이 있었다. 인권위의 권고로 개선되기도 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민원으로 크레파스 ‘살색’을 ‘연한 살구색’으로 바꾸기도 했다. 아무리 범죄인이라도 가혹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인권위의 권고도 이때 나왔다.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학생들을 위해 학교 내 투표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권고도 했다. 인권위는 권고적 성격이라 강제력은 없었지만 당시 권고 수용률이 96%에 달했다. 지금은 들은 척도 안 한다고 하더라.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경영하는 사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인권위에서 일한 시간은 매우 흐뭇하고 재미있었다. 내가 일했던 3년 동안 UN에서 아직 인권위가 설립되지 않은 여러 나라에 한국 사례를 벤치마킹하라고 권유할 만큼 주목받았다.
-EBS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은데.
△자원 빈국인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원동력은 교육이다. 자원 없이 어떻게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겠나.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 저술을 도울 때 우연히 보게 된 자료가 있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지 10년간 미국에서 배출한 박사를 국적별로 보니 미국을 제외하고 한국이 1등이었다. 농민의 아들들이 공부해서 ‘조선 한국’, ‘전자 한국’을 만들었던 거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교육 투자를) 박정희 대통령이 한 일 중 가장 훌륭한 정책”이라고 꼽기도 했다. 그런데 EBS에 와서 보니 교육방송의 공적 재원이 매우 빈약했다. 수신료(2500원) 중 70원만 EBS의 몫이었다. 나머지는 책을 팔아서 충당해야 했다. 그래서 공공 재원을 확충하기 위해 노력했다. 코로나 때 온라인 클래스를 하면서 예산을 2000억원대에서 3000억원대로 늘렸다.
이런 노력과 달리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 황교안 전 한나라당 대표와 윤석열 정부가 추천한 이사들이 제기한 각종 소송에 휘말리며 어려움을 겪었다. 황 전 대표의 3건의 소송 중 2건은 각하, 1개는 무혐의로 끝났다. 이사장 자격 무효 소송도 내가 승소했다. 현재 국민의힘 추천 이사들이 있는 극우단체가 국민권익위에 신고, 고발한 배임 건은 재판 중이다. 나와 비슷한 이유로 해임된 KBS 이사장, 사장 모두 최근에 무효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EBS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고 수고한 모든 시간이 기쁘고 충만하다.
-EBS의 향후 지배구조와 운영방안은.
△자원 빈국을 인재 강국으로 이끌어 온 동력이 교육인데 정부의 지원이 박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적 재원 확충에 대한 시민 사회의 여론도 있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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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후견주의를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BS는 정치적 논란에 휩싸인 적이 없었지만 지난 정부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자신의 저서 ‘자유의 길’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를 평가했는데 ‘자유를 38번 외쳤지만 누구의 자유인가? 늑대의 자유는 종종 양들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우리 헌법 1조에서 21조까지는 늑대의 자유가 아닌 양들의 자유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이 말을 새겨야 한다.
-채널을 돌리다 EBS에서 멈추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품격 높은 프로그램도 눈에 띄는데.
△EBS는 다른 나라와 달리 교육방송이 독립적인 공사로 존재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래서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EBS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는 내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여러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세계적인 석학들을 초청해 강연을 진행하는데 해외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으로 아는 이들도 있다. 특히 시즌 3에서는 역대 최다인 6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출연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 노벨 평화상을 받은 시린 에바디 (Shirin Ebadi),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프랭크 윌첵 (Frank Wilczek) 등 다양한 석학이 출연해 국가를 넘어선 공동체의 가치와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 이뤄질 수 있도록 EBS를 향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유시춘 이사장 △1951 경북 경주 △고려대 국어국문과 졸업 △1973년 소설가 등단 △1985년 장훈고 국어교사 해직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총무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민예총, 민화협 공동의장 △국민정치연구회 정책연구실장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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