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는 장자가, 차례는 맏손자가…20년 묵은 낡은 가정의례준칙

이수빈 기자I 2021.09.21 20:30:58

'건전가정의례준칙'에서 상주는 배우자나 장자가 맡는 것으로 명시
친가와 외가 장례일수 차이 두거나 배우자에게 '미망인' 비하 표현도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폐지법률안 대표발의

1. 각종 장례 물품, 접대 음식, 제단 꽃장식 등을 내가 주도해서 결정했다. 그럼에도 나는 상주가 될 수 없었다. 진료비 수납, 엄마와 동생 보호자, 장례 비용 결제, 손님맞이까지 원치 않아도 도맡아야 했지만 상주는 할 수 없었다. 나는 여자였으니까. 상여를 들거나 영정 사진을 들 수도 없었다. (조OO,여,28,서대문구)

2. 장례식장 담당자가 부고를 작성하러 아드님이 내려오라고 했다. 우리는 딸만 넷이라 했더니 사위님을 보내라고 했다. 큰언니가 상주를 할 거라고 하자,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조카라도 계시면 그 분이 서시는게 모양이 좋습니다'라고 했다. (김○○,여,40, 서대문구)

서울시가 지난 5월 개최한 '이제는 바꿔야 할 의례문화 시민에세이 공모전'에 나온 사연이다. 이 공모전은 의례의 본질적 의미를 살리면서도 변화하는 의식과 다양한 가족 현실을 반영한 결혼·장례문화 확산을 위해 진행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으로 기존 방식으로 의례를 치르는 것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의례의 형식이 아닌 본질적 의미를 되새기자는 취지다.

캠페인을 진행한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의 신민자 팀장은 "성평등 의식은 계속 변해왔지만 결혼·장례 의례만은 준비나 절차상 성 역할 고정 관념이나 성차별적 요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며 "결혼·장례 문화를 개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기획했다"고 말했다.

의례 문화가 사회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거의 관습, 관행이라는 이유로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상주는 아들이, 남성이 맡아야 한다는 인식이 대표적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이같은 관습과 관행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넘쳐난다.

'회사가 친조부모상과 외조부모상 유급휴가일을 다르게 정했다', '아버지 상을 치를 때 장례식장 알림판에 어머니를 '미망인'으로 표시한 걸 보고 '배우자'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등이다.

미망인(未亡人)은 남편과 함께 죽어야 했지만 아직 죽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과부가 스스로를 낮춰 일컫는 말이다.

(사진=이미지투데이)


남자가 상주를 맡는 관습은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한 유교 문화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과거 유교적 전통 아래에서는 집안 대소사를 주관하는 것이 '장자'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같은 낡은 관습은 정부가 정한 가정의례준칙에도고스란히 남아 있다. 1999년 대통령령으로 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에서는 상주는 배우자나 장자가 맡는다(제15조 제2항) 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차례는 매년 명절 아침에 맏손자의 가정에서 지내는 것(제21조 제2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강제성 없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기는 하지만 시대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낡은 규정이란 지적이다. 작년 10월 이수진 더불어민주당(비례대표) 의원은 해당 준칙에 대해 "시대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규정"이라며 폐지법률안을 대표발의하기도 했다.

김선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장은 "시대가 변하고 가족 구성원이 다양해지면서 이에 맞는 결혼식, 장례식 문화가 발굴, 확산되어야 한다"며 "의례의 본질적 의미를 살리면서도 모두가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는 장례식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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