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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을 추모하는 노제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운구차는 오전 9시 18분께 서대문구 연희동 사저에 도착했고 노 전 대통령의 맏손주인 노 변호사의 아들 장호씨가 영정사진을 들고 운구차에서 내렸다.
집안에선 부인 김옥숙 여사가 남편을 맞았다. 유족들은 고인의 영정 사진을 들고 약 5분간 천천히 집안을 돌았다. 고인의 유언대로 노제는 25분여 만에 간소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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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장 개최 여부를 두고 국민 여론이 극명하게 갈렸던 것처럼 영결식에서도 고인을 둘러싼 반응이 그대로 드러났다. 영결식장 주변에선 5·18 사과를 요구하는 1인 시위나 손팻말 항의가 벌어지기도 했다.
장례위원장인 김부겸 국무총리는 “노태우 대통령님은 재임 중에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셨다”며 “이념의 대립을 넘어 12년 만에, 세계가 한자리에 모인 사상 최대의 올림픽이었다. 우리 국민들에게는 불가능은 없다는 자신감을, 세계인들에게는 한민족의 저력을 보여주는 계기였다”고 전했다.
그러나 김 총리는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큰 과오를 저지른 것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국가장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며 “어떤 사죄로도 5.18과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되신 영령들을 다 위로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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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총리는 “서울올림픽 이전 (노태우) 각하께서 하신 6·29 선언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선 승리를 위한 승부수라고 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며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에 이어 바뀐 한국사회 구조의 변화를 확인하는 선언이었다”고 언급했다.
6·29 선언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대표위원이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시국 수습 특별선언이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의 다음해 집권을 위해 마지못해 한 선언이었다는 해석도 있었지만, 고인이 바뀐 시대 흐름을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높게 평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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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군 출신 대통령은 내가 마지막’이라는 고인의 말도 이러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며 “한국전쟁 후에는 문맹률이 80%가 넘고 정규 육군사관학교 1기생 엘리트 장교들이 통치에 참여하는 것은 숙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울먹였다.
노 전 대통령의 유족 등은 영결식이 끝난 뒤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진행했다. 이후 고인의 유해는 경기도 파주 검단사에 임시 안치됐다가 파주 통일동산에 안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