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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장면 하나. 연극 ‘남자충동’은 올해 공연에 앞서 일부 대사와 장면을 수정했다. 1997년 초연 당시의 내용이 2017년의 시각으로 볼 때 가부장적인 남자의 폭력성을 옹호할 소지가 있어 몇몇 설정을 변경했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조광화 서울예대 교수는 “최근 한국사회 여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연극 속 젠더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며 “여성 관객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작품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고민했다”고 말했다.
장면 둘. 7년 차 여성 극작가 김슬기(31)는 눈에 띄는 이목구비 탓에 외모 품평 발언을 곧잘 듣는다. “남자친구 있겠네” “연극은 계속할 거지?” 등 함께 작업하는 일부 연극인들로부터 성차별적 농담을 듣는 일이 적지 않다고 했다. 김 작가는 “데뷔 초에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는데 요즘은 불편하다고 말한다”고 했다.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후 1년. 2016년 5월 17일 사건 당시 여성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여성혐오 범죄로 공론화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 해 10월에는 해시태그를 통해 문화예술계에 뿌리 깊은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세상에 알려졌다. 여권 신장이 형식적·표면적으로 그친 게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이에 반동으로 등장한 남성 역차별에 대한 논의까지 불거졌다. 사회적 논의가 폭발하면서 기존 페미니즘에 이어 극단적 남성혐오로 표현되는 메갈리즘, 남녀 모두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이퀄리즘 등 다양한 ‘이즘’이 종과 횡으로 충돌했다.
△페미냐, 여혐이냐…연극계 덮친 페미니즘
한국 연극계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담아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에서 파생된 시각을 담아내는 작품을 내놓고 있다. ‘남자충동’처럼 페미니즘 시각에서 새롭게 바뀌는 작품도 있고, 아예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건 작품도 등장했다. 지난 2월 ‘아주 친절한 페미니즘 연극’과 4월 1~5일 ‘페미수제연극-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등이 대표적인 페미니즘 연극이다. 이들 작품은 한국사회가 여성에 가하는 일상적 폭력과 두려움을 다뤘다.
예술계 성폭력 문제를 다룬 구자혜 연출의 ‘가해자 탐구부록: 사과문작성가이드’도 공연됐다. 이 작품은 예술계에서 가해자의 변명과 자기방어만이 아니라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시키지 않는 구조적 문제점을 겨냥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서사와 권위적인 대한민국 연극계에 반기를 든 페미니즘 야외 게릴라 연극 ‘페미리볼버’도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마당에서 펼쳐진다. 이은경 평론가는 “페미니즘 연극이란 제도권 밖 차별받는 여성을 무대 위에서 조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며 “최근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이나 문화예술계 성폭력 폭로 등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여성의 자각이 다시 도드라지면서 이에 반응·호응하는 연극 작품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연극의 출발은 80년대로 보고 있다. 극단 산울림 임영웅 연출의 ‘위기의 여자’는 여성의 삶에 주목, 방향성에 대해 질문을 던져 중년여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이 평론가는 “1980년대 여성 서사의 연극은 자기만족에 머물며 중심 담론화되지는 못했다. 이제 여성혐오 및 젠더에 대한 담론이 확산되는 등 사회적 분위기도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3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연극계 주류는 남성적 시각의 작품이고, 여성적 서사의 작품은 적다”면서 “여성캐릭터는 남성캐릭터를 성장시키는 도구로만 다루는 일부 연극에 대해 창작자와 관객이 문제의식을 갖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해석했다.
페미니즘이 시대나 사회의 흐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에 페미니즘과 관련된 연극 역시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지난달 막을 내린 연극 ‘환영’은 일부 관객으로부터 여성을 희생적 존재로만 그렸다고 지적 받았다. ‘환영’은 무능한 남편과 무책임한 친정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성매매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연극을 본 한 관객은 “여성을 희생과 헌신, 모성으로만 규정짓고 있어 공연을 보는 내내 불편했다”고 귀띔했다.
김창화 상명대 교수는 “연극 ‘환영’에 대해 불편하다는 지적은 과도한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이라고 했다. 여성혐오 논란 속에서 되레 사유의 영역이 협소해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환영’ 속 여성은 여성 비하가 목적이 아니라 왜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이 다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 관점을 다르게 봐야한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단순히 불편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부분이다. 외면해선 안되고, 고민해야 할 내용”이라고 덧붙였다.
△관객 문제의식…변화 움직임 활발
이처럼 연극계 페미니즘은 관객에게 발전적 토론의 장도 이끌어냈다. 올 초 공연한 ‘청춘예찬’은 시대착오적 작품이라는 일부 관객의 비판을 놓고 SNS를 통해 수많은 찬반 논란이 불거졌다. 연극계에서는 하나의 작품을 놓고 토론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공연 시장의 질적·양적 성장을 촉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선 한국 연극계의 페미니즘에 대한 시각이 더 세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연극계 페미니즘은 미국식 페미니즘의 아류처럼 보여질 수 있다는 게 평론가들의 얘기다. 김창화 교수는 “제대로 된 한국 여성의 관점은 부족한 채로 해외 사조를 무분별하게, 여과없이 소비하는 단계”라며 “다양한 공부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연극계에서 보다 발전적으로 페미니즘을 다룬 ‘페미그라운드’가 대안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의 남산예술센터에서 지난해 무대에 올려진 이 공연은 여성혐오 및 젠더 문제에 대해 아예 관객과 논의해 제작한 작품이다. 올해는 공동 제작하는 극단과 제작진을 대상으로 성폭력 관련 교육을 받는다는 내용을 협약서에 포함시켜 교육을 진행 중이다.
‘페미리볼버’를 기획하고 작·연출한 김슬기 작가는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색다른 미래를 도처에서 내놓을 수 있도록 연극계 내부는 예민해져야 한다”며 “젊은 연극인들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작업을 시도하고 있지만 각개전투다. 용기를 내 발언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공공극장들은 다양한 예술가의 목소리를 지지해줘야 한다”고 평했다.
<용어설명> 페미니즘(Feminism) : 여성과 남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정치적 운동과 이론들을 아우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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