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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러리 역할 거부…시각장애 의원 김예지의 전진 기록

김미경 기자I 2024.01.20 14:59:32

김예지|248쪽|사이드웨이
우리나라 첫 여성 시각장애 국회의원
부딪힘의 릴레이…단단한 국회 분투
정치 현장 써 내려간 치열한 `고백록`
인생 여정 일대기이자, 여의도 활동기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은 정쟁에서 벗어나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정책과 포용·존중의 자세로 대한민국 정치 품격을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사진=사이드웨이 제공).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여기 ‘어쩌다 보니, 참는 게 일상’이라는 국회의원이 있다. 매일같이 시멘트벽이나 가구 모서리에 부딪히기 일쑤고, 지금도 여전히 동네 음식점과 부동산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시각장애인 국회의원 김예지(44)다. 피아니스트 출신인 김예지 국민의힘 비례의원은 지난 2020년 국회에 입성한 뒤 당 최고위원을 거쳐 최근 출범한 ‘한동훈 비대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까지 맡고 있다.

그가 4년여 간의 여의도 활동기를 다룬 책 ‘(어항)을 깨고, 바다로 간다’(사이드웨이)를 최근 펴냈다. 김예지 의원은 “처음 비례대표 제의를 받았을 때 당 관계자들은 ‘그냥 당신이 안내견과 국회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하는 것’이라며 4년짜리 들러리 역할을 제안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며 “나는 그것을 깨기 위해 여기 왔다. 나는 내 갈 길을 갈 뿐”이라고 했다.

◇인생 여정과 여의도 활동기

이 책에는 장애-비장애의 경계를 넘어 분투해 온 김 의원의 인생 여정과 정치 경험이 오롯이 담겼다. 삶, 장애, 인권, 정치, 공동체 등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책 제목은 김예지 이름 세 글자를 전 국민에게 알렸던 2023년 6월14일 국회 대정부 질문 마무리 발언에서 따왔다. 진영을 막론하고 기립박수가 쏟아진 이례적인 장면으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당시 김 의원은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처한 상황을 ‘코이’라는 물고기에 비유했다. 작은 어항 속에서는 10㎝ 미만으로 자라지만, 강물에선 1m 넘게 자라나는 물고기 ‘코이’를 예로 들면서 “사회적 약자들이 어항을 깨고 기회의 균등 속에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강물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고 발언해 여야 의원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김 의원은 책에서 “내게는 불빛이 필요 없지만, 어두운 밤이면 여러분을 위해 불을 켜드릴 것”이라며 “여러분은 저 뒤편 어항 구석에 남아서 웅크리고 있는 ‘코이’가 있는지 확인해 주길 부탁한다”고 적었다.

국회의원 이전의 어린 김예지도 엿볼 수 있다. 그가 지금의 인내와 극기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외할머니 덕분이다. 김 의원에 따르면 할머니는 장애에 대한 차별은 딱히 없었지만, 대신 성과를 중시했다. “다른 애들이 10장 읽을 때 너는 1장 읽는다. 10분의 1밖에 못 배우는 것”이라며 닦달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또렷하다. 김 의원은 “부딪힘은 내게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그냥 일상이고, 참는 것은 습관”이라며 “장애는 장애대로 나의 일부분일 뿐, 나는 지금 이 상황과 환경 속에서 무언가를 더 잘해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래서일까. 장애와 관련된 농담도 열려 있는 편이다. 그는 “내가 세상에 다가가는 좋은 방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요긴하게 활용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눈치를 보지 말고 뭔가를 말해야 하는 순간, 후딱 해야 할 말들을 해치우고 웃으면서 “제가 안 보여서 눈치가 없나 봐요”라고 능청을 떤다고 책에 썼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점자로 인쇄된 회의자료를 살펴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그가 성찰하는 장애와 인권, 그리고 정치

김 의원은 살아오는 내내 자신에 대한 규정과 낙인을 꿋꿋하게 전복해왔다. 그는 비장애인들과 겨루면서 피아노를 쳤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취득해 돌아왔으며,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국회에 들어온 4년은 ‘열일의 아이콘’이라는 별명처럼 활발한 의정활동을 통해 법을 쉼 없이 발의하고 제정했다. 2023년 12월 기준 대표발의한 법안 수는 169건, 공동 발의는 1381건으로, 21대 국회의원 중 7번째로 많다.

그 많은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장애인 이동권 시위 현장에서 시민들 앞에 무릎을 꿇었고, 독립적 헌법기관으로서 민의를 대변하기 위해 때로는 당론과 다른 선택을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 앞에 ‘내가 만약 이 사람이었다면’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동이 보장되지 않으면 학교, 직장, 병원 등 일상에 필요한 모든 곳에 접근이 어려워지므로 이는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라 유보될 수 없는 인권의 문제임을 지적한다. 날카로운 말로 서로를 찌르기 바쁜, ‘예의’가 실종된 정치의 세계에서 올곧게 국민을 대변한다.

요즘 그의 관심 과제는 ‘격차 해소’다. 약자를 위한 정책,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정책, 다양한 분야의 불합리한 격차를 줄이고 없애는 방안을 모색한다. 갈수록 양극화하는 정치권을 향해서는 “우리 정치가 공격적 자세에서 벗어나 ‘반성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며 “정치적 득실을 따지기 이전에 국민을 끌어안는 게 먼저”라고 말한다.

김예지 의원은 “나는 쇼를 한 것이 아니다. 뭘 보여주려고 온 사람이 아니라 일을 하러 온 사람”이라며 “내가 내리는 순간순간의 ‘작은 결단’과 그 사소한 성실성이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우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면 됐다. 그거면 됐다”고 소신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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