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년 역사의 리먼 브러더스가 무너지면서 금융위기 쓰나미는 전세계 금융시장을 무섭게 휩쓸었다. 그리고 그 타격에서 사실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베어스턴스 모기지 투자펀드 파산(2007.6), 영국 노던록 파산(2007.9)과 컨트리와이드 파이낸셜(2008.1) 파산, 베어스턴스 매각(2008.3), 인디맥 뱅코프 파산(2008.8),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패니메이와 프레디맥 지원(2008.9) 등이 리먼 파산 이전에 도미노 무너지듯 벌어진 사건들이지만 파장은 리먼 사태만 못했다.
리먼 사태는 금융위기에 대한 시장의 인식을 `정말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현실화되는(self-fulfilling)` 국면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전 대통령이 말했듯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공포 그 자체"란 말이 들어 맞은 셈.
글로벌 투자자들은 주식과 은행 예금, 기업어음, 헤지펀드, 국채 등에서 자금을 빼내기 시작했고, 아르헨티나와 헝가리, 한국 등 이머징 마켓에서도 자금을 회수했다.
◇ CEO가 위기 키웠다
1969년 입사한 이후 `리먼맨`으로 오랜 시간 일해 온 리처드 풀드는 지난 1994년 회사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로부터 분리되면서 최고경영자(CEO)로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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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이름을 찾은 리먼 브러더스를 투자은행(IB)과 주식중개 사업으로 확장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월가에서 `행운의 사나이`로 불릴 만큼 승승장구했다. 이 덕분에 2005년부터 2007년간 2억 4000만 달러를 챙겼다.
미국을 금융위기의 심연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2008 10명의 범죄자` 중 9위로 꼽았다.
위험 자산에 대한 투자와 외연 확장 등 몸집 불리기에 주력했던 그는 자신의 회사는 물론, 월가를 무너지게 하고,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 온 핵심적인 이유, 바로 `탐욕`이란 죄를 갖고 있다. 무리하게 차입금을 늘려 파생상품에 투자했고, 이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리먼을 쳤다. 과거 LTCM 위기로부터 회사를 구한 전력이 있는 그가 결과적으로 회사를 구렁텅이로 빠뜨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 6월 리먼 위기설 고조.. CEO는 늑장 대처
풀드 CEO에게 또 하나 죄가 있다면 위기가 눈 앞에 있어도 이를 감지하지도 못했고, 그래서 대처하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2007년 8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자회사 BNC 모기지를 폐쇄했고, 올해 들어서도 모기지 관련 투자 손실이 지속적으로 쌓여만 갔다.
이에따라 "리먼이 어렵다"는 얘기는 베어스턴스 사태 이후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6월 월스트리트저널(WSJ)이 한국 투자자 등으로부터 자금 조달을 타진하고 있다고 보도한 이후 급격하게 팽창했다. 관련기사 ☞ 리먼, 자금압박설 대응해 자사주 매입 리먼, 韓 투자자 모색중..산은·우리금융 물망(상보)
리먼은 결국 6월 상장 후 14년만에 처음으로 분기 적자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모기지 투자 부실 관련 상각 때문이었다.
상황은 이미 급박했다. 그러나 풀드 CEO는 늑장 대응을 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신속하게 투자자를 물색해 자금을 조달하지도 못했고, 부실 사업을 떨어내고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집중하는 등 구조조정에도 신속하게 착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풀드 CEO는 어쩌면 이렇게 숨이 턱에 찰 때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짐짓 모른 척이라도 했던 것일까.
베어스턴스 매각 후 주가가 50% 가까이 떨어지면서도 그는 투자자들에게 "금융시장은 최악은 지나갔다고 본다"고 말했고, 6월 WSJ이 전한 리먼 소식으로 시장의 우려가 깊어지자 그는 고작 전세계 리먼 직원들에게 "WSJ 기자들과는 말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을 뿐이었다.
8월 연준의 재할인 대출을 받을 때까지도 "우리는 연준 대출을 받았다"며 "지금으로선 망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랬으니 2007년 12월엔 이렇게 확신에 찬 발언이 가능했을 것이다.
WSJ에 따르면 그는 당시 누군가와의 개인적인 대화에서도 "내가 있는 한 리먼은 결코 팔리지 않는다"면서 "만약 내가 죽으면 팔리겠지만, 그렇다면 내가 무덤에서 나와서라도 그걸 막을 것이다"라고까지 했다. 잘 나갈 땐 나오지 않았던 그의 공격적이고, 부하 직원들에 대해선 강한 충성심을 요구하는 군대식 리더십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지적도 뒤늦게 나오고 있다.
상황은 급박하게 치달아 갔고, 위험하다는 루머가 퍼진 지 석 달 가량밖에 안된 9월12일, 리먼은 이미 파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회사는 이미 3분기 손실이 거의 40억달러에 달할 것 같다고 고해했고, 리먼의 어음교환소(clearing house)를 담당했던 JP모간은 추가 담보로 50억달러 상당을 요청했다. 산업은행과의 협상도 결렬됐다. 신용평가사들은 리먼이 그 주 안에 자금을 더 조달하지 못한다면 등급을 내리겠다고 경고해서 자금 조달이나 대출 상환 등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 리먼은 왜 구제를 받지 못했을까
그러나 금융위기를 키운 장본인으로 리먼이 공격을 받는 건 당연하지만 왜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리먼보다도 작았던 베어스턴스는 매각을 통해 살리고, 리먼보다 불과 이틀 뒤엔 AIG에 자금을 투입해 살려주었던 것일까.
부실이 결코 더 작지 않은 씨티그룹 역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숨을 돌리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최근 전해지고 있는 리먼 파산 막후 얘기들을 모아보면 정부와 중앙은행도 리먼을 살리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풀드 CEO의 대처가 너무 늦게 이뤄졌고, 이미 정부도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 에디터 출신으로 더타임스 통신원을 하고 있는 앤드류 고워즈는 보고 있다. 폴슨은 리먼에 대해 지원하지 않은 것과 관련, "리먼의 자산에 큰 쿠멍이 나 있었고 자금을 지원해서 리먼과 바클레이즈의 딜을 성사시키려고 했지만 법적으로 불가능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마디로 담보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풀드 CEO가 한국 산업은행,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 등과 투자, 매각 협상을 진전시키고 있던 건 파산 신청 바로 얼마 전이었다. 9월12일까지 그는 BOA와 접선중이었고, 재무부는 별도로 영국 바클레이즈에 리먼 매각을 타진중이었다.
벤 S. 버냉키 연준 의장은 존 테인 메릴린치 CEO, 존 맥 모간스탠리 CEO, 로이드 블랭크페인 골드만삭스 CEO 등 세 명의 월가 IB CEO들을 그날 오후 6시 뉴욕 연방은행으로 불러 모았다. 크리스토퍼 콕스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리먼을 둘러싼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공적자금 투입이나 업계 주도의 구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또 모이기로 했지만 리먼의 문제는 이미 해소 불가능 판정을 받은 게 사실이었다.
그래도 일각에선 정부와 연준이 리먼이 파산까지 가지 않도록 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재무부로선 베어스턴스를 구제한 뒤 시장엔 또 다른 금융사의 실패에 대해 준비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고 판단했을 지 모르지만, 오히려 시장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버렸기 때문이다.
같은 날 리먼의 장부를 뜯어 본 BOA의 케네스 루이스 CEO는 이날 밤 풀드 CEO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리먼의 부동산 포트폴리오가 생각보다 너무 좋지 않아 정부의 지원이 없다면 인수 계약을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메릴린치와의 협상을 개시했다.
14일, 풀드 CEO는 끊긴 동앗줄이지만 BOA의 케네스 D. 루이스 CEO에게 다시 다급하게 전화를 돌렸다. 하지만 한 번도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수화기를 계속 든 사람은 루이스 CEO의 부인. 풀드 CEO는 결국 부인에게 "귀찮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BOA는 이미 메릴린치 인수 쪽으로 마음을 돌린 뒤였던 것. 15일 오전 리먼의 파산보호 신청 몇 시간 뒤 BOA의 메릴린치 인수 사실이 공개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리먼을 구제하지 않은 조치가 잘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프랑스의 재무장관은 "완벽한 오류"라고 말할 정도다. 리먼이 희생양이었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일부에서는 망하도록 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 "사라져버린 IB 시대"
파산보호 신청 이후 리먼은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9월22일 노무라 홀딩스가 일본과 호주를 포함한 리먼의 아시아 태평양 사업부를 인수하겠다고 밝혔고, 다음 달엔 리먼의 유럽, 중동 IB 및 주식 사업부를 사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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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버거 버만을 포함한 자산운용 사업부는 지난 3일 누버거 버만 투자운용이 인수키로 결정됐다.
이런 가운데 메릴린치의 매각과 JP모간, 골드만삭스의 은행지주회사 변신으로 이제 `월가`란 말로 대변되던 투자은행 시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리먼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눈총을 사는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다.
어려움에 처한 와중에도 풀드 CEO를 비롯한 경영진들이 챙긴 보수는 천문학적 수치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고, 최근엔 구조조정 자문을 맡은 애널리스트가 "무계획적이고 급박했던 파산보호 신청 때문에 회사 가치가 최대 750억달러나 훼손됐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